해외입양인, 그들은 왜 떠났고 왜 돌아오나?
2021-05-15
월드뷰 MA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3 |
글/ 황승연(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교수는 늘 좋은 논문을 써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압박을 별로 받지 않고 살았다. 논문의 업적보다는 내가 쓴 논문이 우리 사회를 좀 나아지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이름 없는 저널 속에 파묻혀 도서관 어딘가에 꽂혀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사회를 변화시킬 의미 있는 논문거리는 90년대 초 막 교수 생활을 시작한 나의 눈에는 차고 넘쳤다. 신문에서는 사회의 문제나 모순이 매일 쏟아졌다. 이 기사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어떻게 해결책을 만들 수 있나 고민하면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중국동포 문제이고 또 해외입양인 문제였다.
중국동포 문제
그때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막 수교를 맺은 직후였다. 중국에서 ‘할아버지의 나라’ 조국을 찾아오는 조선족들이 있었다. 그들이 한국 방문을 위해 여권을 만들거나 항공권 구입에 사용하는 비용은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버는 수입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한국에 와서 꼬박 1년은 일을 하고 모아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고, 빚을 갚고 장사밑천이라도 마련해서 돌아가려면 추가로 1년은 더 일을 해야 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3개월 체류 기간을 넘겨 불법체류자가 되고, 범법자의 신분으로 일을 하게 되면서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하고 추방당하는 경우가 흔했다.
이들의 생활과 실태, 조국을 방문하는 동기와 방문 후에 생기는 그들의 태도 변화를 조사했다. 이때는 그들을 ‘조선족’이라고 불렀다. 이 단어에는 약간 비하하는 뜻도 담겨있어서 논문에서 ‘중국동포’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 단어가 지금까지도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논문을 통해서 선량한 대부분 사람이 어길 수밖에 없는 법이면, 법이 잘못되었는지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의 내용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당시에 국회의 동북아연구회를 이끌던 한 국회의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결과, 국회에서 입법세미나 등의 과정을 거쳐서 중국동포의 장기 체류를 허가해주는 법이 통과되었다. 그들이 F4 비자를 받아 장기체류하면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19년 11월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 국적을 가진 중국동포는 536,638명, 한국 국적을 이미 취득한 중국동포는 85,977명이나 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건설공사현장 인부로, 식당 종업원으로 혹은 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는 중국동포들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모국을 방문한 해외입양인들의 불법체류 문제
당시에 중국동포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바로 해외입양인이었다. 6·25 전쟁부터 60~70년대에 해외로 입양 보낸 아이들이 성장해 자신을 버렸던 조국을 찾아왔다. 88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한국이 더이상 6·25 전쟁의 상흔 속에서 가난과 굶주림에 찌든 나라가 아니라고 인식한 결과였다. 올림픽 이후 해외입양인들의 한국 방문이 급증했지만, 한국을 방문한 해외입양아들도 중국동포처럼 관광비자 기간인 3개월이 지나면 모두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렸다. 한국에 머물고 싶어도 떠나야만 했다. 그들을 버린 모국에 와서 또다시 쫓겨나는 해외입양인들의 기사를 보고, 중국동포의 조국 방문 문제보다 훨씬 더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해서 이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들에게도 중국동포와 같이 체류 허가를 내주고,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국회 인권포럼을 이끄는 한 국회의원과 함께 해외입양인들이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을 도왔다. 이후 모국을 찾아온 해외입양인들이 해외 입양에 대한 어떤 기록이라도 제시하면 합법적으로 장기 체류하며 정상적으로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두 법안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기초 조사를 하고 관련법을 만드는데 기여했던 것에 대해 아직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해외입양인, 얼마나 떠났나? 얼마나 버려졌나? 얼마나 팔렸나?
6·25전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약 20만 명의 아동이 해외에 입양된 것으로 추정한다. 전쟁 중에 출국한 입양아와 그 후 행정 공백이 있을 때 출국한 입양아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입양아 중 70% 이상이 미국에 입양되었는데, 경제적 상황이 좀 나아졌던 80년대 들어서 입양아의 숫자는 더 크게 늘었다.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 것을 돈벌이로 생각한다는 의심을 받기 충분했다.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에 6,463명의 아이가 입양 보내졌다. 최고 수치였다. 자기 나라의 아동을 해외로 입양을 보낸다는 국제사회의 지적이 있었고, 그런 나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다음 해부터 숫자가 조금씩 줄었다. 마침내 정부는 OECD 가입으로 인해 1996년부터는 해외입양을 전면 중지키로 했다. 그러나 올림픽 이후, 미혼모의 자녀가 더 늘어나고 국내입양이 갈수록 줄어들자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1990년에 2,962명, 1995년에 2,180명, 2000년에 2,360명을 입양시켰다. 그 후 2010년에는 1천 명대, 2015년 이후에는 출산율의 급감으로 인해 출생아가 크게 줄어 지금은 매년 300명대를 유지하고 있다. 파악되지 않는 입양아의 옛날 통계 자료는 외국의 입국자 통계를 요청해 이를 통해 파악할 수 있을 터인데 지금까지 어느 정부도 이 작업을 하지 않았다. 숨기고 싶은 진실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이 흘러 이들이 성인이 되었고, 자신을 버린 모국을 찾아 돌아왔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가족을 찾는 것이었다.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친모를 통해서 한 번이라도 듣고 싶었지만, 모국은 그들이 한국 국적자가 아니라고 그들을 불법체류자로 몰았다. 범법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다시 떠나거나 아니면 불법체류자로 남아서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인종 간 입양
중국동포나 해외입양인들과 같이 고향에 돌아온 사람을 쫓아내는 그런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이 왜 떠났으며, 왜 돌아오는가를 조사하면서 많은 인터뷰 대상자들을 만났다. 중국동포는 자발적으로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의 후손이다. 그러나 해외입양인은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어릴 때 해외로 입양 보내졌다. 다시 말해 버려졌거나,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한 상품으로 팔려나간 것이다. 그들 대부분 미국과 북유럽의 생김새가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버려진 아이라는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자랐다. 입양아들의 자살률은 평균보다 크게 높은데, 나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2019년 자살률은 26.9명(10만 명당 자살자 수)이다. 그러나 스웨덴으로 입양 보내진 한국 출신 입양인의 자살률은 1990년대에 1,221명이었다. 약 45배의 차이이다. 특히 이들 대부분은 20세 전후였다. 거의 모든 입양이 미국과 북유럽에 집중됨으로써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경험하면서 그들이 친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느끼며 살게 된다. 또 같은 인종 간의 입양이라면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혹은 숨겨졌을지도 모를 양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피부색 때문에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일종의 분리공포를 항상 간직하고 살며,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에 자존감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된다. 입양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옛날에 한국이 얼마나 가난하고 어려웠는지 잘 안다. 그러나 부모가 나를 입양 보낸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친부모를 직접 만나서 꼭 한번은 물어보고 싶다. 왜 나를 버렸냐고.” 부모를 찾거나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한 입양인들이 조국과 부모에 대한 원망을 적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성인이 되면 누구나 그렇듯 부모의 곁을 떠난다. 직장을 잡고 분가를 하거나 혹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난다. 그러나 입양인들은 이때쯤 한국행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 오면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속에서 섞여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하므로 취업을 해야 하지만 3개월만 머물 수 있는 여행자 신분이라서 아르바이트도 쉽지 않거니와, 취업해도 고용주로부터 해외입양인이라는 차별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버림받은 아이였다는 점은 모국에서도 또다시 차별을 당하는 근거가 되었다. 설상가상 불법체류자가 되면 범법자 신분으로 바뀌게 되어 누가 신고라도 하면 당장 추방을 당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리웠던 모국에 와서 다시 버림받는 경험을 하게 되기에 이들이 모국에서 체류 허가를 받게하고, 계속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다시 한국을 떠났다. 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여유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다. 미혼모의 자식이거나, 못난 부모를 만나서 버림받은 아이거나 심지어 매춘부의 아이라는 사회적 편견 앞에서 그들은 다시 고국을 떠나게 된다. 경제적으로 세계 10대 강국이 되고 올림픽뿐 아니라 월드컵 축구대회를 모두 치른 선진국이라고 자랑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어린이 수출국이었다.
그들은 왜 한국을 떠나게 되었고 왜 돌아오나?
5·16 혁명이 있었던 1961년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다. 6·25전쟁이 끝난 후 베이비붐 시대가 196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고,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던 1970년대에도 출산율은 크게 줄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버려지는 일이 급증했다. 난세에 요보호 아동이 생기기 마련이었지만 우리는 이 문제 해결의 가장 쉬운 방법을 해외입양에서 찾았다. 지금까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접근하고 파악하려고 했다. 입양인들이 가진 극적 요소들 때문에 언론에서 일회성으로 다룬 것 이외에, 이 문제는 우리 사회가 숨기고 싶은 사실이었고 그래서 오랫동안 사각지대에 머물러있었다. 감춰진 깊은 상처였다. 어떤 사람은 산업화가 가져온 비인간화의 결과라고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 우리만 산업화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미혼모 발생은 무분별하게 도입된 서구식 개방적 가치관의 영향 탓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OECD 국가 중 어떤 나라가 인종 간 입양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가?
우리가 너무나도 무책임한 본성을 갖고 있어서, 아이들을 외국에 보내 해결하려는 그런 거지 민족성을 갖고 있지 않은지 세계 각국이 의심하고 있다. 감춰왔던 상처가 입양아들이 돌아오면서 드러났다. 1990년대부터 매년 1,000여 명이 꾸준히 고국을 찾아, 뿌리를 찾아, 생모를 찾아 돌아왔다. 하지만 모국을 방문한 그들은 또다시 버림받은 기분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지금 이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있고 그럴 계획도 없다.
입양인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족을 찾는 것
전체 입양인의 약 80%가 부모를 찾기를 원하고, 출생 및 입양 당시의 환경 등에 관한 정보를 원한다고 한다. 전체 입양인의 약 20%가 부모를 찾기 위해 고국을 방문했지만 실제로 부모를 찾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약 5% 미만이 가족을 찾게 되지만 가족을 찾게 된 후 약 60%는 부모의 거부로 가족 상봉이 실현되지 않는다. 입양인들의 자살률이 일반인들보다 수십 배가 높은 이유가 짐작된다.
사람들은 입양인들이 대부분은 좋은 가정에 입양되어 잘 자라고 있고, 극소수만이 문제가 된다는 시각을 갖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자세히 따져봐야 한다. 입양되어 양부모와 함께 사는 과정에서 그들은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인가? 많은 입양인이 긍정적인 답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 중의 일부라도 자신이 양부모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괴로워하고, 자기의 뿌리를 찾고 싶어서 돌아온다든지, 자기 부모의 나라를 알고 싶어서 돌아온다면 그래서 그들의 모국 방문이 앞으로 안정을 찾고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도와야 하지 않는가? 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 있고, 말이 안 통할 수 있고, 안내자가 없을 수도 있다. 이제는 우리 사회와 국가에서 그들을 안내하고 도와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원해서 외국을 나간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가 죄 없는 그들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이 성장해서 스스로 고국을 찾아오고 있다. 아무 연고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고, 친구도 없다. 그들이 또다시 버림을 받는다는 느끼며 고국을 떠나야 하는가?
해외입양인들의 모임, 그들을 키운 가족들의 모임
그들은 자기가 자란 나라에서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키웠던 가족들도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들의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해 별도의 모임을 만들었다. 키워준 부모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가족에게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양부모들은 한국에서 온 입양 아이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주고,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고, 아이들에게 더 나은 교육을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WACAP(미국 한국인 입양아 가족 모임), MAK(미국 미네소타 한국인 입양 가족 모임), AKA(미국 뉴욕 한국인 입양아 가족모임), Euro-Korean League(브뤼셀의 유럽 한국 입양인 모임), Camp Mujigae(미국의 한국인 입양아 Korean Culture Camp), 아리랑(네덜란드 입양인 모임), 한국입양아회(스웨덴), 유럽 한국 입양인 네트워크’ 등이 있다. 우리나라 입양아들을 가장 많이 받아준 미국인들은 6·25 때 우리를 공산주의자들에게서 구해준 것뿐 아니라, 굶어 죽는 아이들도 받아주었고 그들에게 가족 내에서는 충족시켜줄 수 없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주기 위해 시간과 돈을 썼다. 우리는 이런 미국인들에게 고마워하고 있는가? 기독교 문화를 가진 서양인에게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모두 하나님의 자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손을 내가 맡아서 키우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핏줄로 대를 잇는다는 생각이 강해서 입양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제는 잘살게 된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아직도 서양인에게 의존하고 있어야 하는가?
OECD 국가 중 유일한 고아 수출 국가 그리고 국내 입양의 실태
예전에는 가난 때문에 해외 입양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가난하지 않다. 그런데도 여전히 해외 입양이 발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앞으로 계속 해외 입양으로 해결할 것인가? 왜 국내입양은 안 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정상 아이만 입양이 된다. 게다가 예전에는 남아 입양을 선호했는데 지금은 대부분 여아만 입양이 된다고 한다. 특히 장애인 입양의 경우 거의 100% 미국으로 입양되고, 해외입양 전체의 40%가 장애아라고 한다. 입양 정책 이전에 요보호 아동 발생 예방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과연 이것에 얼마나 관심이 있고, 책임의식이 얼마나 있는가?
한때 러시아 아이들의 입양이 많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린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진 이후 더이상 거론되지 않는다. 한때 부동의 1위였던 우리나라의 해외입양아 숫자가 지금은 중국과 인도에 이어 3위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미국과 스웨덴, 스위스, 네덜란드 등 많은 나라에서 한국은 아직도 고아 수출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성숙한 사회인가? 국가의 자부심을 가질 그럴 국격을 갖추고 있는가? 사람을 중요시하고 사람이 먼저인 사회인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유일한 고아 수출국이다. 2020년 출산율이 0.84로 세계에서 꼴찌고 인구의 자연감소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렇다. 최근에 생후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이를 학대와 구타 끝에 숨지게 해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정인이를 입양한 이유가 친딸과 놀아줄 동생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기도 하고, 은행 대출을 쉽게 받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인이 사건 방지책을 묻는 질문에 “일정 기간 안에는 입양을 다시 취소한다든지, 아이와 맞지 않는 경우에 입양 아동을 바꾼다든지”라고 업급했다. 이런 한국 사회의 풍토에서 아이를 둘이나 입양해 훌륭하게 키운 최재형 감사원장의 감동 스토리는 아주 예외적이다.
<lion@khu.ac.kr>
글 | 황승연
경희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독일 Saarbrücken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현재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