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첫 번째 발자국: 로버트 토마스와 동서 문명의 만남 (3)

실패한 첫 번째 발자국: 로버트 토마스와 동서 문명의 만남 (3)

2021-03-20 0 By 월드뷰

월드뷰 MARCH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1


글/ 박명수(서울신학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I. 변화하는 국제질서
II. 요동하는 한반도
III. 동서 문화의 충돌: 병인박해와 제너럴셔먼호 사건
IV. 새로운 가능성: 한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V. 국제관계에서 본 병인박해와 제너럴셔먼호
VI. 로버트 토마스에 대한 평가


1. 병인박해와 대원군의 쇄국정책


처음에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해 프랑스와 천주교에 의지하려고 했던 대원군은 러시아 세력이 물러나자 다소 안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중국의 북경에서 새로운 소문이 들려왔다. 그것은 청나라가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천주교 세력을 반대하며 대대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 중국에서는 가톨릭과 중국 정부의 마찰이 있었다. 이것은 천주교 세력과 손을 잡으려던 대원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 동시에 대원군의 개혁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유림 세력들이 대대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이제 대원군은 입장을 바꿔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문은 한반도를 개화에서 다시금 쇄국으로 바꿔 놓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1866년 초에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187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주교 두 명을 포함한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 9명과 약 8,0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 신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한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 종교 박해였다. 당시 조선에서 선교하던 리델(Félix-Clair Ridel) 신부가 중국으로 도망가서 북경에 있는 프랑스 공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프랑스 대리공사였던 벨로네(H. Bellonet)는 이 사실을 청나라의 외교를 맡고 있던 총리아문의 책임자 공친왕에게 알리고, 종주국으로서 여기에 개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서 공친왕은 조선은 천주교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며, 외교와 내치는 자주적으로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외교적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벨로네는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 파견되었던 로즈(Pierre-Gustave Roze) 제독에게 조선 파병을 요청했고, 여기에 영국 개신교 선교사인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가 통역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토마스는 조선에 개신교를 전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제 막 프랑스 함대가 조선으로 떠나려고 하는 순간,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로즈는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해 배를 돌려 바로 베트남으로 갔다.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가는 것이 좌절되자, 토마스는 미국 국적의 배이면서 동시에 영국 무역회사 메도우즈(Meadows & Company)가 임차해 운영하고 있던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이 배는 조선과의 무역을 추진할 계획이었고, 토마스는 중국이 조선에 자문을 보내 무역을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에 자극을 받았다. 따라서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에 간 것은 조선에 가서 선교하려는 토마스와 무역을 하려는 무역회사의 입장이 서로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토마스 선교사.


2. 제너럴셔먼호 사건


드디어 제너럴셔먼호는 8월 9일 중국 지푸를 떠나 며칠 후 백령도 모두진에, 8월 16일에는 평남 용강현 다미리에 도착했다. 토마스는 먼저 평양에 들러 이곳에서 조선의 정세를 살피고, 무역을 한 뒤 한양으로 가려고 했다. 원래 조선은 외양(外洋)에는 이양선이 운행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내양(內洋)에는 운행을 금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는 이것을 무시하고 계속 평양으로 향했다. 당시 평양은 늦여름 홍수 철이었다.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따라서 8월 20일 평양에 접근했지만, 8월 27일 무렵에 홍수가 끝나고 물이 빠지자 셔먼호의 승무원은 조각배를 타고 강 상류로 올라갔다. 이에 중군(中軍, 종 2품, 혹은 3품의 고위 군인) 이현익이 이를 추격하다가 오히려 체포되어 구금당하자 조선군은 이현익의 석방을 요구했고, 셔먼호는 여기에 대포로 맞대응했다. 이런 가운데 퇴교 박춘권이 이현익을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8월 31일이 되자 제너럴셔먼호는 일종의 해적선으로 변해, 사람을 죽이고, 식량을 약탈했다. 여기에 맞서 조선 측에서도 화공에 의한 섬멸 작전을 계획했다. 강물이 줄어들어 제너럴셔먼호가 움직일 수가 없게 되자, 이것을 이용해 9월 5일 조선군은 배에 불을 붙여서 떠내려 보냈고, 결국 제너럴셔먼호는 불에 탔다. 이런 상황에서 배에 타고 있던 선원 대부분은 강물에 빠져 죽었으나 토마스는 육지로 나와 조선군에 의해서 살육되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목숨을 구걸하다가 살육되었다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성경을 전하다가 순교했다는 당시 목격자의 증언이다. 여기에서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기술한 조선실록의 내용이며, 목격자의 증언은 후에 평양에 온 선교사들이 제너럴셔먼호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게서 들은 내용을 적은 오문환의 기록이다. (다음호에 계속)

<mspark@stu.ac.kr>


1) 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390-391.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대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다. 저서로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