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미국 유학
2021-03-05
월드뷰 MARCH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3 |
글/ 김학은(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교육
구한말, 나라가 어려워지자 백성뿐만 아니라 위정자도 헤쳐나갈 방도를 몰랐다. “남의 나라는 무슨 도리로 문명 개화에 나아가는고, 서로 물으매 서로 모르니 이는 백성이 어두운 까닭이라.”라고 자문자답한 이승만은 그 도리를 알고자 공부를 시작했다. 한성 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은 자신이 깨달은 도리를 백성에게 알리는 게 목적이었다. 그 요지는 기독교를 반석 삼아 통상, 이성, 독립정신, 교육, 외교, 국권의 6대 강령을 지키면 독립을 보존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무력에 관한 얘기는 없다. 이승만은 자신부터 솔선수범해 기독교와 6대 강령을 공부했다.
밀사
1905년,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하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불안을 느낀 민영환은, 영어에 능통한 이승만을 한성 감옥에서 빼내어,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밀사로 미국에 보낸다. 도착 6개월 만에야 존 헤이(John Hay) 미 국무장관과 면담하고, 1년 만에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으나, 이때는 이미 일본이 손을 써놓은 후였고, 밀사 임무는 실패했다. 이승만은 그 실패의 원인을 찾기 위해 체계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것은 <조미우호통상조약>을 둘러싼 국제법에 대한 이해였다.
유학
미국 유학은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평균 2주에 1회 정도 미국 교회나 기독청년 회관 등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내용은 주로 서양사람은 이름도 모르는 한국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한 기독교와 실용주의의 국가였다.
이렇게 이승만은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고, 독신 생활이라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에서 석사,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 워싱턴 대학 성적의 일부를 살펴보면, 영어 1학기는 D 학점을 받았고, 2학기는 B 학점, 역사 과목은 C 학점과 A 학점, 수학은 C 학점과 D 학점을 받았다. 철학은 B 학점, 수사학은 B와 C 받았다. 다음 하버드 대학에서 성적을 보면 정부론은 두 학기 모두 B 학점을 받았고, 역사학은 세 학기를 들었는데, 두 학기는 B점을 받았고, 한 학기는 C 학점을 받았다. 경제학은 D 학점을 받았다.
통상과 선교
이승만은 “당초에 미국이 동양 각국과 통섭을 시작할 때, 두 가지 큰 목적이 있었으니, 일은 통상이요, 일은 선교라.”라고 썼다. 프린스턴 대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세운 대학이고, 그 옆에는 프린스턴 신학교가 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통상에 관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으며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이승만은 한국 문제를 통상과 선교라는 국제 시야로 끌어올린 유일한 독립지사일 것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미국 영향 하 중립>은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가 출판했는데,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학문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양쪽에서 인정받은 셈이었다. 박사학위 논문의 내용은, 미국이 독립 이후, 대서양에서 중립국(비 교전국)인 미국의 통상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의 법과 제도에 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미국독립 당시에 신생 독립 국가인 미국의 통상을 저해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유럽 국가의 식민지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 국가 사이의 전쟁이다. 식민지는 식민 모국의 독점시장이요, 전쟁은 중립국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포격이다. 이 둘을 합친 것이 식민지 쟁탈전이다. 식민지가 많을수록 국제통상과 국제평화는 요원하며 국제통상 이론은 쓸모가 없다. 뒤집어 말하면 독립 국가가 많아질수록 국제통상은 증가하고 전쟁도 줄게 된다는 의미이다.
“통상 교제가 각국에 다 이익이 되는 것이오, 어느 나라에서는 이롭고 어느 나라에서는 해가 될 것이 아니라 태평 안락을 일체로 누릴지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오.” 이것이 미국의 우호(중립) 통상 정책의 골자이다. 여기에 독립 승인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승만은 “새로운 국가가 독립하여 국가 가족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미국이 승인하는 것은, 언제나 대단히 민감하고 책임이 따르는 행위이다.”라는 잭슨 대통령의 글을 학위논문에서 인용하며, 남미 몇 나라의 독립을 승인한 미국의 승인 정책을 탐구했다. 그리고 열강의 독립 승인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정의가 아니라, 통상조약을 지킬 수 있는 재력임도 알았다. 영국과 독립전쟁 와중에 선포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미국이 독립 후에 독립 국가로서, 통상 조약권, 동맹 조약권, 전쟁 선포권의 행사와 그에 따르는 의무를 약속했다.
이승만의 학위논문에 숨겨진 진수가 바로 독립 국가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것이다. 논문은 그의 외교독립 이론서이다. 이승만의 박사학위 내용을 담은 이승만의 책은 미국이 세계 패권 국가가 되어 중립 정책을 포기함에 따라 잊혔다. 그러나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위협에 노출되었던 노르웨이의 유학생이 이승만의 책을 인용했고, 2008년에 역사적 문헌으로 재출간되었다. 세계가 다시 어수선해지면 약소국 지도자가 반드시 참고해야 할 책이 되었다.
인맥
이승만은 유학 시절부터 제퍼슨 전문가였다. 그는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 와중에 프랑스의 원조가 절실했던 때,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외교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살았던 40년 동안 매우 폭넓은 인맥을 쌓았는데, 이는 아직도 전모가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이다. 이승만이 장차 한국 외교독립에 도움이 되는 교우 관계를 체계적으로 시작한 것은, 학창 시절부터이다. 그는 제1차대전 종전, 3·1운동, 만주사변, 태평양전쟁 등을 지나며 신문, 방송, 회의를 통해 한국에 관한 선전 활동에 자신의 인맥을 동원했으며, 이때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사실을 활용했다.
이승만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프린스턴 대학 총장은 후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윌슨(Woodrow Wilson)이다. 윌슨은 사람들에게 이승만이 조국을 독립시킬 애국자라고 소개했다. 하와이 시절 현역 대통령인 윌슨의 딸 혼인 청첩장을 받은 하와이 주민은 주지사를 제외하고 이승만이 유일하다.
이승만은 선교학을 공부하면서, 국제기독청년회(YMCA)의 마트 총재와도 친분을 쌓았다. 이승만이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105인 사건이 터졌는데, 이승만을 체포 위기에서 구한 사람이 마트 총재이다. 마트는 후일 국제기독청년 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이승만이 학업 도중 각국 기독 청년들과 교유했던 곳은 국제기독청년 하령회(夏令會) 회의다. 이 가운데 후일 중국 외교부 장관이 되는 고유균도 있었다. 그와 다시 만나게 된 곳이 제네바 국제연맹 본부인데, 일본의 만주국 설립을 제소하는 중국 정부 대표 고유균의 국제연맹 보고서 작성을 도와주며, 이승만 자신은 <만주의 한국인>을 파리에서 출간했다. 당시 이승만은 무국적자였으므로, 제네바에 갈 때 국무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이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
학업을 마무리할 무렵, 학위논문을 심사받기 위해서, 논문을 제출하고 약간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 때, 한국에서 선교업무를 하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에이비슨(Oliver R. Avison)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왔다. 언더우드와 에이비슨은 쉬지 않고 이승만과 함께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한국 선전”을 했고, 9만 달러를 모금해 20명의 새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다. 세브란스 의학교 교장인 에이비슨 박사는 이승만에게 자유주의를 가르친 의료선교사로, 한성 감옥에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이승만을 도와 질병을 퇴치하는데 애썼다.
이 “한국 선전”에 세브란스 병원과 의과 대학 건물을 기부한 미국 선교본부 이사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 장로가 동참했다. 세브란스는 록펠러(John D. Rockefeller)의 동업자이며, 스텐더드 석유회사의 재무 이사로 세계적인 부호였다. 그는 미국 명문가 출신이며, 인맥이 넓었다. 상원의 실력자 한나 의원과 세브란스, 록펠러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으며, 나중에 가필드(James A. Garfield)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헤이즈(Rutherford B. Hayes) 대통령도 이들과 친구였는데, 그는 주한 미국 공사였던 알렌의 부인인 프랜시스 앨런(Frances A. Allen)의 사촌오빠였다. 장로교도인 헤이 국무장관은 이승만과의 면담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해 전쟁터가 되었던 평안도에 미국 시민의 소개령이 내려졌는데,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 교인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이때 이승만은 두 가지를 요청했다. 첫째는 중국의 문호개방정책을 한국에도 적용해달라는 청이고, 두 번째는 <조미우호통상조약>의 존중이다. 헤이 장관이 답변했다. “나 개인적으로도 혹은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의미에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약상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헤이 장관은 이 면담 6개월 후 사망했다. 그러나 헤이 장관이 사망하지 않았어도 정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조미우호통상조약>을 일방적으로 내버릴 것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나중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 사실을 자신에게 감춘 것을 알고 분개했다. 그리고 “국무부 문서 보관실에는 한 조약서가 잠자고 있다. 이 조약은 폐기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완전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라고 추궁했다.
성과
이승만은 친구들을 모아 미국 전역에 친우회를 조직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이승만과 구미 위원회는 1920년 3월 17일 미국 연방상원의원 찰스 토마스(Charles S. Thomas)를 통해 한국 독립안을 상정했는데 34대 46으로 부결되었다. 그는 구미 한국위원회 특별위원이었다. 부결의 배경에는 제1차 대전 직후의 복잡한 국제정세가 있었다.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이 다루는 기간은 1776년부터 1872년까지이다. 미국의 국력이 영국을 앞지른 것이 1872년이고, 곧 스텐더드가 전 세계 석유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승만은 누구보다 먼저 석유 시대가 곧 오리라고 내다보았다. 이승만은 일본이 석유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미국과 태평양에서 충돌할 것을 예측했고,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미국과 일본의 우호통상조약이 연장되지 않았다. 우호통상조약의 해제는 이승만에게 곧 전쟁을 의미했다. 그 방아쇠가 석유였다.
“만약 미국이 석유 수출을 거부한다면 우리[일본]는 네덜란드령 인도제도, 말레이시아에서 얻고 만약 미국이 무력에 호소한다면 우리[일본]는 서부 태평양에서 이를 격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승만은 독립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본이 태평양의 미국 섬을 공격할 것을 암시하는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썼다. 그의 외교독립 이론서의 예측이었다. 그 예측은 6개월 뒤 정확하게 맞았다. 그 뒤 1942년 2월 23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라디오에서 한국 문제를 처음으로 거론하며 “추축국[일본]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길이 국제연합의 승리에 있다.”라고 방송했다. 이승만의 친우 홉킨스(Harry L. Hopkins)가 루스벨트의 참모로서 <카이로 선언>의 초안을 작성하여 한국독립의 문을 열었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한미우호통상조약>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사시켰다. 마침내 반세기 만에 <조미우호통상조약>의 밀사로서의 사명은 완수되었다. 이로써 유학 기간에 완성되었던 이승만의 정치경제 사상은 그 가치를 증명했다.
<hakun@yonsei.ac.kr>
글 | 김학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피츠버그(University of Pittsburgh)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Ph.D.)학위를 받았다.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 대학교(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경제학과 조교수와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부 명예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