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으로 읽는 ‘독립정신’

독립적으로 읽는 ‘독립정신’

2021-03-04 0 By 월드뷰

월드뷰 MARCH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


글/ 김명섭(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독립정신>은 왜 집필되었나?


<독립정신>은 한국 근대사의 대표적인 책 중 하나이다. 한글로 출판된 이 책을 읽지 않고 한국의 근대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치적 이유에서 오랫동안 외면되어 왔다. 우선 일제 조선총독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고, 1960년 이승만의 불명예퇴진 이후 정치적 금서처럼 취급되었다. 이제는 이승만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각자가 독립적으로 <독립정신>을 읽어볼 때가 되었다.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에서 발간되고 있는 <우남 이승만 전집>의 1권과 2권은 이 책의 역주본과 영인본이다. 역주본은 읽기 쉬운 현대어로 풀고 각주를 달아서 출판한 것이고, 영인본은 1910년 출간된 책을 그대로 촬영해 펴낸 것이다. 영인본에는 원본에 수록되었던 111장의 시각자료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역주본에는 출판기술 상의 문제로 원본에 있던 시작자료들이 생략되었다. 영인본에 수록된 시작자료들과 한글을 보면 당시 이승만이 “독립”의 의미를 대중에게 설명하고,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독립정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은 <독립정신>보다 늦게 출판되었지만, 그보다 먼저 이승만이 집필한 <청일전기>이다. 이 책은 1894년 동학 농민봉기를 계기로 청과 일본이 이 땅에서 충돌했던 청일전쟁에 관해 이승만이 1900년 옥중에서 집필했던 전쟁학적 저술이다. 청일전쟁의 결과 1895년에 체결된 시모노세키평화조약의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1884년 갑오정변에 의해 얻고자 했던 청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열강들의 개입 속에 국제적으로 보장받게 된 것이다.

국제적으로 보장받은 독립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지키려는 주체적 노력이 없다면 이 독립은 지켜질 수 없었다. 이승만은 “일본이… 임진년에 한 번 시험하다가 실패한 후 삼백 년 동안을 다시 예비하야 갑오전쟁[청일전쟁]에 그 욕심을 이루었다”라고 보았다. “임진왜란보다 더 큰 난리가 갑오전쟁이오 한인에게 더욱 통분히 여길 바”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독립졍신>을 썼지만, 그러한 독립이 스스로 쟁취된 것이 아니라 청일전쟁의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평화조약에 의해 인정된 것을 수치스럽다고 보았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되고 대한제국의 독립이 선포된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청일전쟁 이후 국제적으로 보장된 대한제국의 독립이 위기에 처했음을 직시했다. 1904년 2월 7일 제물포(인천)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해군을 일본 해군이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러일전쟁은 2월 8일 일본 함대의 여순(旅順, Arthur) 러시아 함대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1904년 1월 러시아 육군은 113만 5천 명이었다. 그리고 예비군과 국민군이 약 350만 명에 달했다. 일본이 동원할 수 있는 총병력은 약 120만 명 정도였다. 이에 비해 1905년경 대한제국 정부에서 집계한 대한제국 군대의 병력은 8,842명 정도에 불과했다. 러시아와 일본 중 어느 쪽이 승전국이 되든 대한제국은 독립을 기약하기 어려웠다. ‘옥중 죄수’ 이승만은 집필 중이던 영한사전 작업을 중지하고, “대한제국의 자유 독립을 위하야”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 두 글자가 있지 아니함이 참 걱정이라” 감옥 안에서 “급히 서둘러 이 책을 기록”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왕이나 양반층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처럼 민초들이 독립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독립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한문에 능통했던 이승만이 순 한글로 <독립정신>을 집필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독립정신>은 어떻게 집필되었나?


이승만은 옥중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는데, 기독교 사상, 특히 개신교 사상은 이 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할 때만 해도 영어와 신학문을 배울 목적을 가졌을 뿐 “부처와 공자의 위대한 가르침을 아는 사람이라면 기독교회의 가르침을 믿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생사의 기록에 섰던 한성감옥에서 초월성을 체험했으며, 서구 문명의 융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개신교의 가르침을 전제군주정의 개혁과 대외적 독립 보전을 위한 사상적 기초로 삼고자 했다.

이 책에서는 동서고금의 다른 옥중저작(獄中著作)들과 유사한 특성들이 발견된다. 첫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신체적 구속 상태에서 쓰인 절박성, 둘째, 저자의 신체적 구속을 초래한 당시 정치 권력과의 대척성, 셋째, 다른 문헌들을 충분히 참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쓰인 간결성 등이다. 옥중의 열악한 집필 조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단기간에 탈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옥관(獄官)들이었던 김영선(金英善), 이중진(李重鎭) 등의 배려가 있었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여러 참고도서도 활용할 수 있었다. 옥중학교 설립에 감동한 선교사들의 도움과 한성감옥 관리들의 양해 속에 이승만은 옥중 서적실(書籍室)을 만들었는데, 이 서적실에는 약 250권의 책이 비치되었다.

둘째, 이승만은 과거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여러 차례 응시하며 한학을 연마했던 동양적 지식인이었고,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졸업할 때까지 영어와 함께 신학문을 습득했던 서양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배재학당 재학시절 이승만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ohn, 1864-1951)이었다. 서재필은 1896(고종 33)년 7월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설립하고, 최초의 한글 전용 신문인 <독립신문>, 그리고 최초의 영어 신문인 The Independent를 발행했다. 1898년 1월 1일 자로 협성회 초대 회장 양홍묵과 함께 주간지 <협셩회회보>를 창간하기도 했던 이승만은 1898년 4월 9일에는 유영석, 최정식 등과 함께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일간신문인 <ᄆᆞㅣ일신문>을 창간해 사장이 되었고, 같은 해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뎨국신문>을 창간했고, 최초의 근대적 기자(당시 명칭은 기재원)가 되었다.

셋째, 저자는 수감 후에도 지속되던 집필활동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옥중에서의 선행저작들은 이 책의 기초가 되었다. 감옥에서 저자는 각종 서적을 번역하고, 영한사전을 편찬하고, 신문에 논설을 기고하는 등의 문필활동에 종사했다. 이승만이 옥중에 있던 1900년, 제물포에서 존스(George Heber Jones, 趙元時, 1867~1919) 선교사가 <신학월보>를 창간했는데, 옥중의 이승만은 이 월보에도 기고했다. 이승만은 수감생활 중이던 1901년 2월부터 1903년 4월까지 2년 2개월간 <뎨국신문>에도 익명의 논설을 기고했다. 옥중에서 비판적 신문 논설을 쓴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매우 특이한 경력이었는데, <뎨국신문>에 게재했던 논설들은 이 책의 밑그림이 되었다.

넷째, 옥중동지들도 이 책의 집필에 도움을 주었고, 당대의 지식인들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그의 옥중 독서 목록에서는 유길준의 <西遊見聞(서유견문)>이 발견된다. 옥중에서 이승만은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신흥우(申興雨, 1883-1959), 정순만(鄭淳萬, 1873-1911), 그리고 박용만(朴容萬, 1881-1928) 등과 만났다. 특히, 이상재는 한 세대가량 앞선 연장자로서 이승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KOBAY라는 경매 사이트에 매물로 나왔던 1954년 태평양출판사 재판본.


<독립정신>의 함의는 무엇인가?


이승만 자신의 총체적 삶이 이 책의 내용과 완전히 부합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책의 내용 또한 많은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이 책의 함의는 당대의 맥락 속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첫째, 이 책은 흔히 서세동점의 시대라고 불렸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문명충돌의 최전선을 경험했던 20대 청년의 옥중 저술로서, 그러한 문명충돌을 한국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대한의 독립이라는 주제로 집필한 최초의 순 한글 정치사상서였다.

둘째, 이 책은 독립국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증가해온 세계사적 흐름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러한 세계사적 흐름에 참여하고 있다. 저자는 대외적 독립을 지향했지만, 대외적 독립운동이 복고적 고립, 나아가서 다른 외국으로의 복속으로 이어지는 부작용에 대해 경계했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가 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혹은 친러파 인사들과 달리 대한제국에 대한 지정학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작았던 미국이나 프랑스를 모델로 삼았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셋째, 이 책은 주자학적 세계관에 빠져 있던 지배층보다 민중에게 기대하면서 민중 스스로가 독립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책의 저자는 일찍이 서유럽에서 가톨릭의 질서에 맞섰던 개신교 사상에 근거해서 유교적 신분질서와 유교에 근거한 중화주의적 세계관(유교 문명 자체가 아니라)을 배격했다. 또한 “백성이 백성을 위하여 백성으로 조직된 정부”를 내세우는 미국식 민주정치를 “제일 선미한 제도”라고 보았다.

넷째, 이 책은 미국식 ‘민주정치’를 최선의 제도라고 보면서도 과도기적으로는 황제와 백성이 협력하는 헌법 정치를 통해 외세로부터의 대외적 독립을 우선적 목표로 삼고 있다. 정치제도가 “백성”의 정도(수준)에 달려 있다고 보았고, 1897년 조선을 버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선포한 고종황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는 군주정치에서 민주정치로 넘어가는 세계사적 흐름에 착목하는 동시에 민주정치보다는 헌법 정치를 대안으로 제시했고, 헌법 정치를 통한 군민협력을 통해 대외적 독립을 이룩하고자 했다. 이처럼 헌법을 통해 군주권을 제한하고, 백성의 자유 권리에도 한계를 두고자 했던 저자의 입장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직후 국민의회 내의 혁명파 중에서 입법에 대한 군주의 거부(veto)권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줌으로써 왕의 권위를 선용한 국가개혁을 추구했던 진보우파(지롱드당)의 입장과 유사하다.1)

다섯째, 이 책은 독립을 위협하는 제국들과 맞설 자주적 힘이 부족한 상황에서 대한제국이 ‘중립’을 지향하는 것의 무망(無望)함을 지적했다. 이러한 국제정치 인식은 중국이 주동이 되고 관계국들이 보장하는 조선의 중립을 구상했던 유길준의 인식과 비교해보더라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여섯째, 이 책은 책의 앞부분이나 후록 “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 등을 통해 이 책이 지닌 계몽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을 분명히 했다. 저자는 대한 독립을 위해 군민이 함께 추구해야 할 “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들로서 세계와의 소통, 새로운 입법, 새로운 외교, 국권 존중, 공적 의리 존중, 그리고 자유 권리 존중 등을 제시했다.

끝으로, 이 책이 순 한글 사용을 통해 언어적 민족의식 발전에 미친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 책의 순 한글체는 이 책이 집필될 당시 지식인들이 즐겨 읽었던 <皇城新聞>이나 1920년 4월 1일 자 <東亞日報> 창간호의 국한문혼용체와 비교해도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순 한글만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이승만의 한글 사상은 그의 탈옥미수사건 당시 한 자루 권총을 전해주었던 주시경과의 사상적 교류도 연관되어 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그것이 쓰인 1904년의 한성감옥에서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살아있는 문화재이다. 이승만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남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독립적으로 당대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 <독립정신>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bluesail@yonsei.ac.kr>


1) 당시 프랑스 국회는 의장을 중심으로 왼쪽에 앉은 좌파(자코뱅파)와 오른쪽에 앉은 우파(지롱드파)가 대립했다. 당시 좌파와 우파는 모두 혁명파였다는 점에서 구 체제(앙샹 레짐)의 보수를 추구했던 왕당파(수구파)와는 모두 차이가 있었다. 당시 좌우파의 핵심적 차이는 당시까지 국민에 의해 신격화되고 있던 왕의 권위를 혁명정신에 따라 부정할 것인가, 아니면 혁명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선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 이러한 입장의 차이가 국회가 만든 법률에 대한 왕의 거부권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줄 것인가 하는 쟁점에 따라 좌우파로 선명하게 나뉘어졌다.


글 | 김명섭

파리1 팡테옹-소르본 대학교 박사이며, 제19대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역임했다. <전쟁과 평화: 6·25전쟁과 정전체제의 탄생>으로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겸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원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