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이승만의 중요한 전환점: 배재학당과 한성감옥
2021-03-03
월드뷰 MARCH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
글/ 윤은석(호서대학교 교수)
이승만에 대한 키워드를 몇 가지 추려보자면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대통령, 기독교 장로일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서술하면 애국심과 민주주의 정신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삶에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의 탄생에 앞장섰고, 일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그렇다면 이런 그의 삶이 시작되었던 것은 언제일까? 본 소고(小考)는 독립운동, 대한민국 대통령, 기독교 장로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청년 시절 이승만의 전환점을 살펴볼 것이다.
전환기 이전의 이승만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에서 1875년 3월 26일,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왕족으로서의 신분(양녕대군 후예)은 조선 말기에 현실적으로 크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친 이경선은 과거에 낙방해 특별한 직업 없이 살아갔던 양반의 한 사람이었고, 몰락은 그의 집안을 묘사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 삶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종교이다. 그의 부친은 왕족의 후예로 이승만을 유교 정신에 충실한 선비로 키우고자 했다. 모친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모친이 절에서 제사를 지내고 용꿈을 꾼 이후 이승만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불교적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이승만은 어린 시절부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생일마다 모친과 함께 사찰에 가서 복과 장수를 기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입신양명을 위한 한학 공부에 몰두했다. 양반으로서 몰락한 가문의 위신을 다시 세우는 길은 오직 과거 급제뿐이었다. 이에 서당 훈장의 딸이었던 모친은 이승만에게 천자문을 가르쳤고, 모친의 열정적인 교육열로 인해 6살에 천자문을 암기했다. 또한, 그의 가족은 이승만이 3살 때 서울로 이사를 했는데, 이것은 아들의 교육을 위한 모친의 결정이었다. 그는 1887년경 과거에 도전할 때까지 몰락한 가문을 살리기 위해 한학 공부에 열중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887년부터 시작한 그의 노력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실상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해오던 한학 공부는 더는 출세의 수단이 되어주지 못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정진해온 사람에게 목표의 상실이 얼마나 큰 실망이었겠는가? 그러나 실망은 더 큰 전환을 위한 새로운 기회였다. 그로 인해 그가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다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배재학당, 민주정신 습득의 장소
한학에 천착했던 이승만은 사실 구시대의 사고와 정신에 갇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서방 정신을 배울 기회가 생겼는데, 바로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신긍우가 그에게 배재학당을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배재학당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선교사가 1886년에 설립했고, 이후 관직의 등용문이 되곤 했다. 정부는 배재학당 졸업생과 재학생을 시험 없이 관료로 임명했기 때문에 갑오개혁으로 인해 관직의 길이 막혔던 양반들에게는 막힌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이승만도 1895년에 배재학당의 영어과에 입학했다. 영어를 배워서 출세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배재학당의 교육에는 서방의 역사를 비롯한 정치제도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은 그의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매개가 되었다. 특별히 그는 배재학당에서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공부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조선왕조라는 정치 체제 속에서 개인은 왕조의 절대적 통치의 대상일 뿐이었고, 정치적으로 개인을 보호할 법적 체계는 전혀 없었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에게 민주정신을 불어넣어 준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은 바로 서재필이었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중심인물로 미국에 망명한 뒤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의사가 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갑오개혁이 이루어지자 1895년에 미국인 신분으로 귀국해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 활동했다. 이때 그가 활동했던 장소 중 한 곳이 바로 배재학당이었다. 서재필은 1896년 5월부터 배재학당에서 1년간 강의를 했다. 그는 이때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쳤는데, 서재필이 가르친 민주주의의 실천 방식인 토론과 다수결의 법칙은 당시 학생들에게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특별히 배재학당 학생들은 서재필이 1896년 7월 2일에 설립한 독립협회와 유사한 협성회를 만들었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가 대중적 토론의 장이었던 것과 같이, 협성회도 회원들이 모여서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개혁 등의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었다. 이승만은 협성회의 초대 맴버 13인 중 한 사람이었고, 후에 회장으로 활동했다.
배재학당을 통한 이승만의 내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바로 상투 제거한 것이다. 1895년 12월 단발령이 시행되었을 때, 이승만은 조선의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던 상투를 잘라버렸다. 이런 행위는 그가 조선이라는 구시대에 갇힌 봉건적 인물이 아니라, 근대정신을 가지고 민주정신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인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의 내면에 분명해진 독립정신과 민주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한 도구는 신문이었다. 1898년 1월, 그를 포함한 배재학당의 협성회 회원들이 <협성회회보>를 창간했다. 그는 협성회보의 주필로 활동하며, 주간 신문인 <협성회회보>를 일간 신문으로 확대했다. 또 <매일신문>을 창간했으며, <제국신문>의 창간에도 동참했다. 이 신문들은 그가 배재학당에서 배운 민주정신과 독립정신을 확산시키는 하나의 도구였다.
한성 감옥, 기독교 신앙을 향한 첫걸음
그는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다. 수구세력과 충돌은 있었지만,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 등 독립협회 회원들은 수구세력의 회유 대상이 되었다. 1898년 11월 19일,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협회 회원 17명은 중추원 의관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이승만은 박영효를 중추원 의장으로 추천한다. 당시 박영효는 갑신정변을 통해 새로운 내각을 수립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승만은 여기에 가담했다. 그 결과 1899년 1월 5일에 이승만은 중추원 의관에서 해임당했고, 박영효의 쿠테타 음모가 발각되어 그해 1월 9일에 경무청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투옥된 지 20일 후인 1월 30일에 감옥으로 반입된 권총을 가지고 최정식, 서상대와 함께 탈옥했다. 그는 감리교 선교부로 도망쳤지만, 곧 다시 체포되었고, 탈옥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수로 한성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다. 같이 탈옥을 시도했던 최정식과 서상대는 사형을 당했다. 10kg의 칼을 목에 쓰고, 고문의 후유증을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이승만에게 일상적 평안은 거리가 멀었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사람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6·25전쟁 당시 수많은 군인이 죽음의 현장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죽음의 위기가 인간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역시 삶과 죽음의 실존적 위기 속에서 죽음 이후를 생각했다. 그는 한성감옥에서 선교사를 통해 영어로 된 신약성경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성경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신앙인으로서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배재학당에서 들은 설교를 기억했고, 자연스럽게 설교 때 배운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의 기도는 단순했다. 먼저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그다음은 나라의 구원을 기도했다. 이렇게 감옥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자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평화가 임했다. 불교와 유교의 전통에 있던 그가 기독교 신앙체험을 한 것이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이 겪은 깊은 기독교 신앙체험은 증언하게 되어있다. 이승만 역시 죽음의 고통을 느끼던 때 경험했던 신앙체험을 주변 수감자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40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개종했다. 여기에는 이상재, 이원긍 등의 양반도 포함되었다. 더 나아가 이승만은 감옥에서 의미 있는 삶을 찾았다. 그것은 감옥에서 학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깊은 신앙체험을 통해 인간 영혼의 소중함을 깨달은 그는 수감자들을 교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영어, 일어, 문법, 산수, 한자, 성경, 기도 등을 가르치는 감옥 학교를 열었다. 또한, 선교사들이 감옥에 반입해주는 서적들로 옥중 도서관을 만들었는데, 감옥 서장이었던 김영선은 이승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도서관의 책은 주로 기독교 서적이었고, 당시 선교사들이 발행하던 《그리스도신문》, 《신학월보》도 있었다.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체험과 개종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정치사상과 기독교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배재학당을 통해 민주정신을 배웠고, 독립을 위한 자주 의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인간이 바른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기독교이고, 기독교가 바로 나라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성감옥은 그의 정치관과 신앙관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장소가 되었다.
정리하면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대통령, 기독교 장로의 씨앗은 청년 이승만의 배재학당과 한성감옥 시절에 뿌려졌다는 것이다. 그 씨가 자라서 이승만을 활동할 수 있게 했으니, 그런 점에서 청년 이승만의 전환점은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출발이 될 것이다.
<startag222@hanmail.net>
글 | 윤은석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교회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서울기독대학교, 성결대학교에서 강의했고, 현재 호서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양과목 담당 조교수로 봉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