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첫 번째 발자국: 로버트 토마스와 동서 문명의 만남(II)

실패한 첫 번째 발자국: 로버트 토마스와 동서 문명의 만남(II)

2021-02-17 0 By 월드뷰

월드뷰 FEBRUARY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2


글/ 박명수(서울신학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I. 변화하는 국제질서 (1월호)
II. 요동하는 한반도
III. 동서 문화의 충돌: 병인박해와 제너럴셔먼호 사건
IV. 새로운 가능성: 한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V. 국제관계에서 본 병인박해와 제너럴셔먼호
VI. 로버트 토마스에 대한 평가


1. 흔들리는 조선 사회


이 같은 중국의 변화는 한반도에도 커다란 충격을 가져왔다. 조선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왔으나 그 중국이 이제는 세계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은 한반도에도 중국과 같은 격변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여 서울을 떠나 시골로 피란 간 사람도 있었다.

이런 국제적인 변화와 함께 조선 사회는 심각한 내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하나는 그동안 조선을 지탱해 왔던 성리학적인 질서의 쇠퇴였다. 과거 신분 사회의 기초였던 반상의 구별이 퇴조해 가고 있었다. 17세기에 전체 인구의 4할에 이르던 노비가 19세기가 되자 1할로 축소되었다. 조선 사회에는 소농 체제가 형성되었고, 평등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다.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인구의 증가로 인해서 식량의 수요가 늘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경작지 개간에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거꾸로 이것은 자연의 황폐를 가져왔고, 생산력의 저하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이 관리들의 부패였다. 관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농민들을 착취했고, 이것은 농촌 사회의 황폐를 가져왔다. 그 결과 피할 수 없는 것이 농민의 반란이었다. 1862년에는 삼남 지방 70여 곳의 군현(郡縣)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란(民亂)이 발생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진주 민란이다. 결국, 조선 사회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과거 14년 동안 집권하던 철종이 아들 없이 죽자, 1864년(양력) 초 당시 궁궐의 실권자인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즉위하게 했다. 그가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고종이며, 그의 아버지 이하응은 대원군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몰락한 왕족으로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서구 사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기보다는 지방의 토호 세력을 극복하고, 더욱 강력한 왕권 체제를 이룩하려고 했다. 결국, 대원군은 정세의 흐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종이 즉위한 1864년은 한반도에 매우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동학을 창시한 최재우가 사형당하고, 러시아는 한반도에 통상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프랑스는 천주교와 함께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고, 영국은 개신교와 함께 통상과 선교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가 의지하고 믿어왔던 중국은 한편으로는 서양 제국과 개방적인 교류를 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해 종주국의 권한을 유지하려고 했다.

경주시 현곡면 용담의 최제우 동상.


2. 새로운 사상의 등장과 그 한계: 최재우의 동학 창시


1860년을 전후해서 조선에는 변화하는 국제 사회와 동요하는 민심을 반영하는 새로운 종교가 출현했다. 그것은 1861년 등장한 최제우의 동학이다. 최제우는 원래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서 당시 조선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직시하며 새로운 종교를 일으켰다. 당시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서구 문명의 도전을 받고 있었는데, 최재우는 서구 문명과 전통적인 사상을 새롭게 종합하여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핵심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이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서학에 대비하여 동학(東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런 동학사상은 유교의 성리학적인 질서와는 대립하는 것이다. 결국, 최제우는 1864년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서학파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 고종 1년에 일어난 일이다.

최재우의 동학은 인간의 평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혁신적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서는 여러 가지로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서구의 근대적인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동양 사회에 뿌리 깊은 도술에 의지했다. 당시 조선 백성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감록과 같은 비기(祕記)에 의존하고 있었다. 최재우 역시 도술로서 많은 병자를 고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도술이 근대 기술로 무장한 서구 세력을 막아내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해국도지(海國圖志). 중국 청대 후기의 학자인 위원(魏源)의 저서.


3. 러시아의 위협


1860년 북경조약 이후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러시아의 등장이다. 과거 조선은 러시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나라였다. 하지만 북경조약 이후 러시아는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조선과 이웃한 나라가 되었다. 당시 널리 읽혔던 위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에 보면 중국은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서양 열국보다는 러시아를 더욱 두려워했다. 러시아는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영토 자체를 확장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러시아 공포증은 조선에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과 중국이 자신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러시아도 영국과 프랑스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일 러시아가 조선에 진출하면 이것을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도 조선에 진출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산업에서 영국이나 프랑스에 미치지 못하는 러시아는 이들 나라와 경쟁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러시아가 취한 정책은 조선과 공식적인 무역을 하는 대신에 국경을 중심으로 육로를 통하여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러시아인과 군인들의 생활에 필요한 소극적인 무역으로 국한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방침에 의하여 러시아는 중앙정부가 나서기보다는 지역의 지방관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육로 교역을 모색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 조선에 있어서 러시아는 여전히 무서운 존재였다. 이런 가운데 고종 1년인 1864년 무장한 러시아 관원이 얼음이 덥힌 두만강을 넘어 함경도 경흥부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하게 되었고, 조선은 이것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들이 편지 한 장을 던져주기에 뜯어서 보니, 바로 러시아 사람들로서 물품을 서로 거래하고자 한다면서 회답을 요구하므로, 이는 상사(上使)에 전하여 보고하여 경성에 계달(啓達)하고 황도(皇都)에 자문(咨文)을 보낸 후 의논할 수 있는 일이며, 지방관이 함부로 결정할 바가 아니라고 써주었더니 그들은 그만 곧 돌아가 버렸습니다. 강 연안의 위아래로 파수가 있는 곳에 동정을 살피라고 엄히 신칙하였으며, 던져준 편지의 원본은 단단히 봉해서 올려보냅니다.

고종 1년, 조선은 내적으로는 동학의 도전을 받고 있으며, 외적으로는 러시아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보면 통상은 조선 조정의 범위가 아니라 황도, 즉 북경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중화 문명권 밖의 세계와 교류하는 것은 중국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조선은 중화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4. 천주교의 부상


러시아의 통상 요구는 조선에는 새로운 국제적인 과제를 가져왔다. 그것은 러시아의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고종이 즉위한 다음에 벌어지는 중대한 일이며, 결국 대원군이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 같은 어려움에 처한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 천주교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책이 제시되었다. 당시 천진조약으로 중국에서 중화 질서가 붕괴하고, 기독교의 선교가 자유로워지자 조선의 천주교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사실 철종 시대에 천주교는 상대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고, 신자들도 많이 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천주교인들과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천주교를 하나의 새로운 대안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실질적으로 고종의 유모는 천주교 신자였고, 대원군의 부인은 이제 막 천주교에 입문했으며, 그의 사돈 가운데서도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은 천주교 신부에게 만일에 러시아를 막아준다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특별히 당시 승지로서 고종을 가르쳤던 남종삼을 중심으로 천주교 지식인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손을 잡고, 남하하려는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서 베르뇌(Simon Francois Berneux) 주교는 러시아인은 국적과 종교가 달라서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유럽 열강과의 교류가 러시아의 한국 침투를 대비하는 방안이다”라고 말했다. 유럽 열강, 즉 프랑스와의 교류가 러시아의 지배를 막는 길이라는 생각은 그 후 에도 계속되는 중요한 사고였다.

당시 중국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영국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중국의 실권자인 공친왕은 서양을 더 이상 오랑캐라고 부르지 않고, 중국은 서양 세력과 협조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이 프랑스와 천주교를 통해서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입장은 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실패하고 말았다. 대원군은 자신의 태도를 바꾸어서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한국 종교 역사상 가장 심각한 교난(敎難)을 가져왔다. 그것이 바로 병인박해이다. (다음 호에 계속)

<mspark@stu.ac.kr>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가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회교사학회 부회장이며, 미래한국 편집위원이다. 저서로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