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Polaris)
2020-12-08
월드뷰 DECEMBER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6 |
글/ 이상원(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프로라이프 VS 프로초이스
폴라리스, 즉 북극성은 항법장치가 발달하지 않았던 범선 시대에 배의 항로를 바르게 설정하는 데 필요한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왜냐하면, 북극성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극성보다 더 밝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알려진 배의 불빛들이 바다에 많이 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을 따라가면 십중팔구는 길을 잃고 헤맸다. 망망대해에서 항로를 잃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낙태죄 폐지를 두고 논쟁과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프로라이프(pro-life) 진영과 프로초이스(pro-choice) 진영을 모두 망라하여 낙태허용 시점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등장하고 있다. 낙태죄의 전면폐지를 주장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14주 이전까지 낙태를 허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 두 주장은 프로초이스(pro-choice) 진영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10주까지 낙태를 허용하자는 주장이나 심장박동이 감지되는 시점 이후의 모든 낙태를 금지하자는 주장은 프로라이프(pro-life) 진영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낙태죄 전면폐지 주장이나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자는 주장은 여성의 행복권을 태아의 생명권보다 중시하는 입장이다. 10주나 심장박동이 감지되는 시점 이후의 낙태를 금지하자는 주장은 이론적으로 태아의 생명권이 행복권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여성의 행복권과 자기결정권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낙태 전면 허용이라는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해 어느 정도의 양보와 타협이 불가피하다는 현실론이 반영된 입장이다. 이상하게도 모든 입장이 인간 생명은 임신 순간부터 혹은 수정란이 형성된 시점부터라는 생명의 시작점 이론을 아예 무시하거나 애써 외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느덧 임신설이나 수정란설은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이 되어 버렸다!
이 상황을 항해에 비유한다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나온다. 기독교 생명윤리라는 배가 항로를 잡으려고 하고 있다. “생명윤리”라는 선명(船名)을 가진 배들이 여러 척 떠 있고, 그 배마다 밝은 불빛을 내면서 항해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배를 따라오면 바르고 안전한 항로를 잡을 수 있다고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느 배도 눈을 들어 폴라리스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배도 수정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 생명이 시작된다는 폴라리스적 전제를 말하지 않는다. 아니, 폴라리스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폴라리스를 보고 항로를 잡으면 자기들이 가고 싶은 행복의 항구로 직행하지 않고 빙 돌아서 갈 것 같고 항로가 힘들 것 같아서다. 폴라리스를 외면하니 좀처럼 배들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정처 없이 헤맨다. 큰 재난이 곧 닥칠 조짐이 보인다. 힘없는 작은 아기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잔인하고 냉정한 사회! 그리고 힘이 있는 어른들은 자기 힘을 뽐내며 유물론적이고 공리적인 행복의 허상에 취하여 거들먹거리는 사회! 이 사회가 바로 눈앞에 열리려고 하고 있다. 행복이라는 미소로 위장한 미녀의 모습으로 서서히 다가오지만 일단 그 손아귀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잔인한 악마로 둔갑하게 될 사회!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인간은 수정 순간 혹은 임신 순간부터 영혼을 가진 전인으로서의 생애가 시작된다는 입장은 생명의 시작점과 관련된 모든 생명윤리 문제들을 풀어내는 항구적인 사도신경적 권위를 가진 전제다. 이 전제로부터 이탈하면 윤리적인 문제들이 줄줄이 터져 나와 감당할 수 없게 된다. 혹자는 현대에는 수정란설 혹은 임신설이 대세가 아니라고 반문을 제기할는지 모른다. 지금 수정란설 혹은 임신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범주가 너무 한정되어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100년도 채 안 되는 좁은 역사적 공간만을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시각에서 보니까 그런 것일 뿐이다. 눈을 들어서 인류 역사를 통시적으로 개관해 보면 수정란설 혹은 임신설은 수천 년 이상의 긴 기간 동안 끊어지지 않고 견실하게 흘러온 마르지 않는 강줄기를 형성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이론은 수천 년의 풍상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이론이다. 왜 살아남았는가? 이 이론은 생물학적으로, 유전학적으로, 성경적으로, 교회사적으로 견고한 뒷받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살아남아 정말로 인간 생명을 철저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하여 그 생명을 견실하게 유지할 것이다.
생명의 시작점은 철저하게 불연속적인 점이어야 한다. 이 점 이전에는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 생명으로서의 특징이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이 시점부터 살아 있는 인간 생명으로서의 특징이 선명하게 나타나야 비로소 생명의 시작점이 될 자격이 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살아 있는 인간 생명은 자기복제와 단백질생성을 해야 하는데, 이 두 가지 작용이 시작되는 시점이 바로 수정이 이루어지는 시점이다. 사실상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과학적 논쟁은 끝난 것이다. 더 덧붙일 것도 없다. 유전학적인 과정은 이 사실을 한층 더 강화시켜 준다. 생식세포에서 정자와 난자가 형성되고 다시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형성되기까지 부계에서 온 염색체와 모계에서 온 염색체 사이에서의 유전자교환, 정자와 난자로 쪼개지는 과정에서 840만 가지 새로운 염색체 배열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선택되고,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840만 가지 새로운 염색체 배열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선택되는 등, 천문학적인 규모의 염색체 배열상의 변동을 겪다가 수정이 이루어지면 염색체 배열이 정해지고, 그 이후에는 염색체 배열이 영구적으로 유지된다. 그 이후 어느 시점에서도 이와 같은 변동에 필적할 만한 변동은 없다. 그런데 정파적인 욕심과 유물론, 실용주의, 공리주의, 경제적 이익 등에 눈이 먼 현대인들은 과학적으로 너무나도 명확한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
성경은 수정 순간 영혼을 가진 인간 생명이 시작된다는 명제를 강고하게 지원한다. 시편 51편 5절에서 다윗은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다윗은 잉태의 시점의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나”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나”라는 표현은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에게만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잉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함”인데, 야함은 “성교를 갖다”라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은 남자와 여자가 성관계를 갖기 위하여 침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아기가 되는 것을 보고 성교를 가지는 순간과 아기가 들어서는 순간을 동일시했다. 이와 같은 성경의 관점이 수정란설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입장이 되었다. 수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정자가 사출되어야 하고, 정자가 사출되기 위해서는 먼저 남자가 오르가슴에 도달해야 하고,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교가 시작되어야 한다. 이처럼 성경은 절대적으로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직전의 어느 시점에 영혼을 가진 인간 생명이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성경은 수정란설이 어떤 경우에도 공격받지 못하도록 호위무사가 되어 보호하는 형국을 취한다.
욥이 낙태된 태아를 “아이”라고 호칭한 것(“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 “빛을 보지 못한 아이”, 욥 3:16)이나 누가가 태중의 세례요한이나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이에 대하여 동일한 용어인 브레포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눅 1:41; 18:15)은 욥이나 누가가 태중의 아이를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고 있음을 뜻한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라는 호세아서 12장 3절의 표현이나 세례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표현(눅 1:15)은 태아가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면 납득하기 어려운 표현들이다.
교회사도 수정란설 혹은 임신설을 지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변적 생물학에 근거하여 남아의 경우에는 잉태 후 40일째 되는 날, 그리고 여아의 경우는 90일째 되는 날 영혼이 들어와 인간 생명으로서의 일생을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탈무드에 영향을 주어 유대교의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에 충실했던 초대교회 교부들은 성경은 임신 순간부터 영혼을 가진 인간 생명으로 본다는 점을 발견한 후에 임신설을 주장했다. 40일설-90일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여 신학 체계를 세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영향을 주어 중세 천 년 동안 40일-90일 천하였다. 그러나 성경을 중시했던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임신설을 주장했다. 이후 고배율 현미경 등의 발견을 통하여 정자와 난자, 수정과정의 관찰이 가능해지면서 수정란설이 인간 생명의 시작점이라는 사실이 확립되어 종교개혁자들의 임신설과 조화를 이루면서 임신-수정란설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서구사회가 세속화되고, 유물론의 지배를 받고, 공리주의와 실용주의 이념들에 장악되면서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임신-수정란설을 버리고 종주의, 출생시설, 뇌파설, 원시선설 등이 등장하여 의료계를 혼돈 속에 빠뜨리고 광범위한 낙태를 조장했다.
낙태의 윤리적 문제들
임신설-수정란설이라는 사도신경적 전제를 외면할 때 낙태행위에 중대한 윤리적 문제들이 줄줄이 뒤따라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첫째로, 낙태는 인류 보편의 윤리적 원리인 황금률의 원리를 정면으로 깨뜨리는 행동이 된다. 황금률은 성경에도 있고(“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동양 격언에도 있으며(역지사지[易地思之]), 서양에도 있다(칸트의 제1 정언명령). 황금률은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행복 추구를 위하여 아이를 낙태시키려고 하는 경우에 만일 자기 자신이 태아의 입장이라면, 자기를 잉태한 여성이 “너는 나의 행복에 장애물이 되니까 죽어야 해! 너는 장애가 있으니까 살 가치가 없어, 너는 죽어야 해! 너는 사생아로 태어날 운명이니까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나아!”라고 자신에게 말할 경우에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고 동의할 수 있을까?
둘째로, 수정란 시점부터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낙태는 명백한 고의적 살인행위가 된다.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십계명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문명권의 도덕률에서도 예외 없이 발견되는 인륜의 길이다.
셋째로, 낙태는 성경이 말하는 일반적인 정의의 원리에도 어긋난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의 원리를 보여주는 좋은 비유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다(마 18:12-14). 어느 목자가 100마리의 양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의 양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길을 잃었다. 이 목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99마리의 양이 가는 길을 정지시키고 한 마리를 찾아 무리에 합류시킨 후에 길을 갈 것인가? 그렇게 결정하면 한 마리는 혜택을 입겠지만 99마리의 양들이 모두 불편을 겪을 것이며, 효율적으로 양들을 관리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아니면 한 마리를 내버려 두고 99마리만을 몰고 길을 갈 것인가? 그러면 한 마리는 잃어버리겠지만 99마리는 편하게 풀을 뜯고 효율적으로 전체 양 무리를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목자는 99마리의 양들이 가는 길을 일단 정지시키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편을 선택한다. 목자는 기어코 한 마리를 찾아내어 무리에 합류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양 떼를 몰고 계속하여 길을 간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태아는 우리 사회 안에서 가장 힘이 없고 연약한 약자 중의 약자의 범주에 속한다. 태아는 자기 의사를 표현할 능력이 없으며, 자기를 의지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기방어수단도 없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하신 것은 약자에 대한 이와 같은 관심 때문이었다. 성경적인 정의의 원리는 우리 사회가 태아가 우리 사회의 건강한 성인들에게 아무리 큰 불편을 끼친다 하더라도 태아를 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배려하고 끌어안고 함께 갈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건강한 성인들에게 끼칠 불편함을 이유로 태아를 죽이는 잔인함에 대하여 분노하신다.
넷째로, 낙태는 형사적 정의에도 맞지 않는다. 형사적 정의의 핵심은 동해보복의 원리다. 동해보복의 원리는 형벌은 죄를 범한 사람에게, 그가 범한 죄의 분량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만큼 부과할 것을 요구한다. 이 원리에 비추어 볼 때 낙태는 어떤가? 태아를 죽이는 행위는 태아의 입장에서는 사형이라는 중형을 받는 것인데, 태아에게 사형이라는 중형을 받을 만한 죄가 있는가? 태아는 아무런 죄도 행하지 않았다. 태아는 심지어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않았다. 심지어 태아는 이 세상에 태어날 생각조차 한 일이 없다. 그런데 어떤 형법적인 근거로 태아에게 사형이라는 무거운 중형을 부과하는가? 오히려 태아 탄생의 원인을 제공한 남성 곧, 정자를 제공한 남성에게서 죄를 찾아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여성에게서 죄를 찾아야 하지 않은가? 강간 등을 통하여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경우에 그 해결책으로 태아를 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태아가 임신되는 것을 원했는가? 태아가 자기가 잉태되게 하려고 어떤 행동을 했는가? 태아도 어느 날 갑자기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잉태된 것이 아닌가? 태아도 피해자가 아닌가? 태아 형성의 책임은 정자를 제공한 남자에게 있는데, 이 남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태아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어떻게 형사적 정의의 원리에 부합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종로에서 뺨을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요약하면, 임신의 순간 혹은 수정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폴라리스적 전제로부터 시작하면 생명윤리라는 배는 인간 생명이 따뜻한 돌봄을 받는 아름다운 항구를 향하여 흔들림이 없이 가겠지만, 이 전제를 외면하고 다른 불빛을 따라가면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당할 것이며, 비인간성과 잔인성이 기다리는 항구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swlee7739@hanmail.net>
글 |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과(B.A.), 동 신학대학원(M.Div.),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Th. M.),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교(Th. D.)에서 수학했다. 미국 보스턴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대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