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2020-06-18 0 By worldview

월드뷰 06 JUNE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8


글/ 이은선(안양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6·25전쟁 과정에서 많은 전쟁 포로들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 포로들은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회담 과정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등장하였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나타내고자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에게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정신 교육을 실시하였고, 기독교 등 여러 종교의 포교 활동도 어느 정도 허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휴전 협정 과정에서 이 반공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민감한 협상 주제가 되었다. 북한과 중국은 모든 포로를 전원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미국과 남한은 본인의 의사에 따른 자유 송환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53년 5월에 접어들면서, 미군은 반공포로 송환을 중립국 관리하에 두자고 제안하면서 휴전 협정을 조기에 종식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를 배제하려고 했다. 더구나 미군은 전쟁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전후 한국의 방위 책임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상의 없이 1953년 6월 18일에 일방적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반공포로들을 석방했다.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 정부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휴전을 밀고 나가는 미국 정부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 방위를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해, 휴전 협정에 반대하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이승만의 휴전 협정 반대가 단순히 구호에 그치지 않고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지자 미국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은 결국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약속하며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상호 관련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반공포로의 등장


1951년 7월에 판문점에서 연합군 대표와 북한군과 중공군 대표가 휴전 협정 체결을 위한 회의를 시작했다. 12월 18일에 포로 교환 협상을 위해 포로 명단을 교환했을 때, 공산 측 포로는 북한군 11만2천 명과 중공군 2만 명으로 합계 13만2천 명이었던데 반해 연합군은 미군 3천2백 명, 남한군 7천 명, 유엔군 1천6백 명으로 총 1만2천 명이었다. 당시 양측의 포로의 숫자 차이가 매우 컸으며 포로 교환 원칙에 대한 이견이 생기면서 회담은 장기화되었다. 북한과 중공군 측은 포로 전원의 본국 송환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미국과 남한은 포로들의 1 대 1의 교환과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을 주장했다. 특히 남한은 북한군 포로들 가운데 상당수가 남한에서 강제로 징집당해 북한으로 끌려갔다고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석방할 것을 주장했다.

많은 수의 북한군이 1950년 9월부터 12월 사이의 급속한 북진 과정 중에 연합군 측에 포로로 잡혔으며 1·4후퇴 과정에서는 반대로 많은 미군과 한국군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연합군에게 붙잡힌 포로들은 거제도에 수용하고 미군이 관리했으나, 말이 잘 통하지 않자 나중에는 한국군에게 수용소의 통제와 감독을 맡겼다. 그러나 포로 숫자가 많아지면서 수용소 내에 다양한 자치 조직이 생겨났고, 이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수시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이데올로기 갈등이 가장 심했는데 특히 포로 교환이 논의되면서 다툼은 더욱 격해졌다. 공산주의 사상에 투철한 포로들은 남한에 남으려는 반공포로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미군은 1952년에 포로 심사 과정 중 반공포로들 가운데 일부를 민간인으로 구분하여 석방하려고 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개별적인 의사 확인 과정을 방해하면서 전원 북송을 주장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미군은 정신 교육을 통해 포로들이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도록 유도하였다. 각 종교 단체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였는데 특히 목사들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수용소 내에 많은 기독교인이 생겨났다. 후에 이들은 반공포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용된 포로들 중에는 남한에서 북한군에게 억지로 끌려갔다가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북한 체제에 실망하여 남한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러 이유로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반공포로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양측의 충돌이 더욱 거세졌다. 그러한 갈등이 정점에 달한 것은 1952년 5월, 공산 포로들이 수용소 소장 도드(Francis Townsend Dodd) 준장을 납치한 사건이었다. 수용소 내에서 폭력과 살인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결국 포로들을 광주, 논산, 부산 등으로 분산 배치시킨다.

반공포로 처리는 휴전 협정 체결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미군도 기본적으로 포로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을 주장하였지만, 협상 막바지에 이르러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 협정 체결에 반대하고 북진 통일을 주장하자, 미군은 휴전 협정 과정에서 이 대통령을 배제하고 협상을 빨리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미군은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는 중립국 관리위원회의 관리하에 둔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6.25 전쟁 당시 야지에 철조망을 둘러쳐 만든 임시 포로 수용소의 적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미군 헌병들 – 1950년 9월 4일.


3.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정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단이 별로 없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종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휴전 협정을 신속하게 처리하기를 원하였고, 소련도 스탈린이 사망한 후에는 신속한 정전 협정 체결에 나서고 있었다. 이렇게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휴전 협정이 진행되었지만, 이승만은 그때까지 북한의 남침에 대비한 확실한 군사적인 대책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군은 1953년 4월에 이미 부상병 포로들을 교환하였고, 6월에 접어들어 포로 석방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한국의 이익을 담보할 수 있는 명확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이승만은 압력 수단으로 휴전 협정에 참가했던 한국 대표단을 철수시키고, 반공포로 송환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이승만이 가장 강력하게 원했던 것은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에 미국의 군사 지원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확실한 안보의 안전판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미온적이었다. 이승만으로서는 미국에 압력을 가하면서 휴전 협정을 반대한다는 한국 정부와 국민의 의사를 행동으로 보여줄 분명한 수단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수단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당시 반공포로는 광주, 논산, 부산 등 7곳에 분산되어 관리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들을 관리하는 헌병사령부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개편해 유엔 사령부의 지휘를 받지 않고 대통령의 직접 지휘를 받도록 했다. 그리고 1953년 6월 18일 오전 2시에 원용덕 헌병 사령관에게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35,698명에 달하던 반공포로 가운데 27,389명이 자유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미군이 직접 경비를 담당했던 부평에서 47명의 사망자와 6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이승만은 미군과 공산 당국자들에게 휴전에 반대하는 한국 정부의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반공포로를 석방한 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두 가지를 확실하게 얻어내고자 하는 외교 전략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북한의 침략을 확실하게 억제할 수 있도록 남한의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미국의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또 하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요청이었다.


4.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방위를 확실하게 담보하기 위해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 가장 중요한 외교적 과제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전략적으로 휴전 협정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미국에 지속해서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하였다. 당시 미국이 체결했던 방위동맹에는 두 가지 수준이 있었다. 하나는 유럽의 주요 국가들로 구성된 나토와 맺은 방위동맹이었다. 이 동맹에는 나토가 침략당할 때 미국은 자동으로 참전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필리핀과 오스트리아와 뉴질랜드 등과 체결한 방위동맹으로 침략을 받을 경우, 군사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나토 수준의 동맹을 요구했으나 미국 정부는 의회의 승인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래서 1954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 주둔을 통해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는 인계철선 전략이 채택되었고, 그와 함께 한국군의 지휘권이 유엔 사령부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 이후 한국이 전쟁을 겪지 않고 장기적인 평화를 누리면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안정적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5. 결론


6·25전쟁이 일어났던 6월을 맞이해,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맺어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그동안 한국 발전의 안전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바탕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을 다시 도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unlee@anyang.ac.kr>


글 | 이은선

서울대와 총신대에서 공부하였다. 안양대학교 신학대학 역사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안양대학교신학연구소 소속의 인문한국플러스 사업단 단장, 한국개혁신학회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