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기독교 사회 복지

6·25전쟁과 기독교 사회 복지

2020-06-17 0 By worldview

월드뷰 06 JUNE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5


글/ 장금현(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교수)


들어가며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고통 받는 상황에서 한국은 방역 모범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듯 보인다. 이에 혹자는 한국의 의료 복지가 선진국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극찬한다. 그렇다면 작게는 의료 복지, 크게는 한국의 기독교 사회 복지 체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이는 각종 재난으로 고통 받는 백성을 위하여 왕이 필요한 양곡을 지원했던 삼국 시대나 조선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것으로 한국의 사회 복지 체계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근대적 의미에서 한국의 사회 복지 체계를 갖추는 과정을 설명할 때 기독교를 배제하고 논의하기 어렵다. 한국 사회는 알렌(Horace Newton Allen) 선교사를 통해 현대 의학에 기초한 의료 복지 체계를,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를 통해 교육 복지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 초기부터 가난한 아동, 청년, 여성, 농촌 복지에 힘썼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는 복지 체계가 초기보다 오히려 약화되었는데, 일제의 강압에 학교는 폐교되고, 선교사들은 추방당했으며, 교회는 일본 교회에 예속되어 이전의 독자적인 복지운영 체계를 갖추기 어려웠다.

그러면 한국의 사회 복지 체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6·25전쟁이 라고 생각한다. 전쟁은 한국 사회를 파괴시켰지만,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특히 피난민의 복지 욕구에 응답한 경험이 현재의 사회 복지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 UN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1952년 기준으로 국민의 1/2이 구제 대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의 예산만으로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주로 외국 원조 단체(외원 단체)의 지원으로 국민을 구제해야 했다. 전쟁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 중에 국제 원조가 국가 재건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전쟁 중에 내한한 외원 단체들은 1950년 12월 설립된 주한국제연합민간원조처(UNCACK)에 등록하고 1952년 7월 외국민간원조단체연합회(KAVA)를 조직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7개 단체가 참여했다가 1954년에는 33개 단체로, 1958년 11월까지는 10개국의 59개 단체로 증가했다. 북장로교 선교사 로즈(Harry A. Rhodes)와 캠펠(Archibald Campell)에 의하면 28개 단체는 사회사업과 함께 선교에, 31개 단체는 교육, 건강, 사회 복지, 구호 및 사회 개발에 관심을 가졌다.1) 이 중에서 미국 교회에 속한 단체가 가장 많았는데 일례로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부는 한국 교회를 위해 1950년부터 1954년 6월까지 약 180만 달러를 모금했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회는 1950년 가을부터 매년 10만 달러 이상을 보내 주었다. 1954년에는 ‘감독호소기금(Bishops’ Appeal Fund)’으로 명명된 모금 운동을 전개했는데 목표액 100만 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160만 달러를 모금했다.2) 그러면 미국 교회가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이유가 무엇인가? 최원규는 그의 서울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에서 그 이유를 다음 몇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구한말부터 한국은 개신교가 크게 발달한 미국 교회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였고, 둘째, 미국의 민간 사회사업 단체 중에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단체가 많았으며, 셋째, 해방 후 미군의 적극적인 6·25전쟁 참여 등에 그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3)

대표적인 외원 단체는 기독교세계봉사회(CWS), 선명회(WV), 세계구호위원회(WRC), 스완슨복음전도회(ESEA), 기독교아동복지회(CCF), 기독교어린이복지센터(CCWC), 구라선교부(ML), 의수족재활사업(ARP) 등이다.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활동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단체는 기독교세계봉사회다. 이 단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과 유럽 국가들을 돕기 위하여 1946년 북미외국선교협회, 미국연방기독교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 미국위원회가 공동으로 설립한 구호 단체다. 이 단체는 미국 개신교와 정교회에 속한 교파의 구호 활동을 대변했을 뿐 아니라 다른 서방 국가들이 보내는 구호품도 전달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6·25전쟁 중에는 미국 교회를 포함하여 세계교회협의회와 루터교세계구제회 외에 다수의 구호 프로그램을 위한 한국 내 대행을 맡았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1946년부터 한국의 구호 및 복구를 지원했다. 감리교 선교사 빌링스(Bliss Billings)가 책임자로 선임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사임한 뒤, 1910년부터 1941년까지 31년간 동산기독병원(현 대구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병원장을 역임했던 북장로교 선교사 플레처(Archibald G. Fletcher)가 그 일을 이어받았다. 그는 초기에 월남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원을 하다가 6·25전쟁을 계기로 전재민(戰災民)으로 대상을 넓혔다. 전쟁 후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남미, 캐나다와 호주 등 많은 교회가 의류와 곡물, 부식물, 현금 등을 기독교세계봉사회를 통하여 지원했다. 목원대학교 신학과 교수를 역임한 김흥수 명예 교수는 그의 저서를 통해 “천문학적 숫자”라 할 정도로 많은 지원품을 한국으로 보냈다고 했는데4) 1953년 한 해에만 미국의 개신교회들은 기독교세계봉사회를 통해 현금 271,341.70달러, 1,599,752.82달러 상당의 의류, 약 5,469,882파운드의 물품을 보내기도 했다.5) 1954년 사업을 위해서 기독교세계봉사회는 일반 프로그램 40만 달러, 의·수족사업 5만 달러, 결핵 퇴치 5만 달러 등 총 50만 달러를 편성했다.6)

그리고 1951년 7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에서 선출된 대표들은 기독교세계봉사회 산하 한국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은 북장로교 선교사 애덤스(Edward Adams), 총무는 초기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의 아들인 헨리 아펜젤러(Henry D. Appenzeller)였다. 위원회는 산하에 6개 특별위원회(아동 복지, 미망인 사업, 대부, 가축, 결핵, 스태프)와 9개 도 위원회(서울, 제주, 7개 도) 그리고 125개 지역 위원회로 조직되었다. 김흥수 교수에 따르면, 지역 위원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의 목회자들과 장로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파괴된 한국 사회를 복구하고 전재민들을 구제하는 복지 사업에 기독교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다만 기독교세계봉사회가 모든 사람 즉 도움이 필요한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에게 동등하게 분배하라고 요구했지만, 교회 중심으로 나누어 준 경향이 있었기에 기독교인들에게 더 많은 구호품이 돌아갔다.7)

총무로 봉사한 아펜젤러는 3년 동안 전재민들을 위한 구호 활동에 전력을 다하다 백혈구 부족으로 쓰러져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받던 중, 그해 12월 1일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0월 13일과 14일 각 교파 선교부와 기독교세계봉사회는 뉴욕에서 모임을 갖고 구호와 복구 활동을 위한 교파 간 협력을 논의하였다. 여기에서 세계기독교봉사회는 자신들의 활동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① 필요한 사람에게 종파나 정파의 차별 없이 봉사를 통해서 기독교의 사랑을 표현한다.
② 과거의 한국이 아닌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도록 한국인들을 지원한다.
③ 한국인과 미국인의 우호 관계를 강화시킨다.
④ 한국 교회와 초교파적인 교회 사이의 교제를 강화시킨다.
⑤ 한국에서 교회 간의 협력을 증진시키고,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분열적인 요소를 막는다.
⑥ 한국 교회의 복지 사업에 대한 관심을 재고시킨다.8)

<기독신보> 10월 26일 기사에 따르면, 기독교세계봉사회는 정전협정을 체결한 지 약 3개월이 지난 1953년 10월 22일 제6차 총회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었다. 총회에 보고된 주요 사업은 분유 사업, 가축 사업, 의수족 사업, 결핵 예방 사업, 과부 사업, 의류 사업, 아동 사업, 탁아소, 편물 사업, 자립 생활을 위한 대부 사업 등이다. 이는 1951년 한국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 범위를 설정한 것보다 훨씬 커졌다. 특히 이 총회에서는 앞으로의 방향에 대하여 “구제보다는 재건 사업을 통하여 수천만 명의 실업자를 구호하고 극빈자를 자주토록 지도”하기로 결의하였다. 즉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기존의 구호 사업보다는 특정 사업들을 통하여 스스로 독립하고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전재민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혹자는 외원 단체의 구호물자가 “천박한 물량주의”를 양산해 냈다고 비판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자립과 독립 정신을 빼앗아 갔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한국인들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였다. 피해 복구는 정부의 한정된 예산으로 턱없이 부족했기에 여기에 적절하게 부응한 외원 단체 특히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기독교세계봉사회와 재한선교부와 함께 활동한 한국 기독교는 여기에서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기독교 사회 복지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그러한 활동 경험이 한국 사회의 복지 체계를 세우는 데 귀중한 자산이 된 것도 사실이다.


맺음말


6·25전쟁은 한국에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역설적으로 기독교 외원 단체의 활동이 한국 기독교 복지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복지 체계를 세우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물론 제도적인 면에서 정부의 입법 과정과 행정 체계를 세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정부가 국민의 복지 욕구를 실질적으로 얼마만큼 충족시켰느냐는 별도의 문제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 복지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회 복지 체계 구축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외원 단체, 특히 기독교 외원 단체와 함께 했던 구호 활동 경험이라 할 수 있다.

<jgh0347@hanmail.net>


1) Harry A. Rhodes, Archibald Campell,History of the Korean Mission Presterian Church in the U.S.A. II: 1935-1959 (New York: CEMR, 1964), 326.
2) 허명섭, “6·25전쟁과 한국교회,” 『본질과 현상』 20호(2010), 90.; 감리교 유형기 감독이 미국교회를 방문해 피난민과 교회 재건을 위해 받은 구호금이 1951년 120,000달러, 1952년에 106,000달러였다. 유동식, 『한국감리교의 역사II』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1994), 758.
3) 최원규, “외국민간원조단체의 활동과 한국사업 발전에 끼친 영향,” 서울대학교대학원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논문(1996), 56-57.; 미국교회가 반공산주의 노선에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공격으로부터 한국과 한국교회를 도우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은선, “6·25전쟁과 미국 복음주의와 한국교회,” 「영산신학저널」 44(2018), 199-237.; 탁지일, “북미교회의 한국전쟁 이해 미국장로교회와 캐나다연합교회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39호(2013), 281-305.
4) 김흥수, “한국전쟁 시기의 기독교 외원단체의 구호활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23호(2005), 109.
5) Harry A. Rhodes and Archibald Campbell, 326.
6) Arnold B. Vaught, “Relief and Reconstruction in Korea,” Church World Service(1953.11.1.), 7.
7) The Staff and Committee of KCW, “Korea Church World Service-a half yearly report,” 김흥수 엮음, 『WCC 도서관 소장 한국교회사 자료집-한국전쟁 편』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395.
8) Arnold B. Vaught, “Relief and Rehabilitation,” Report to Korea Planning Files: Asia-Korea 1953-1973), 김흥수, “한국전쟁 시기의 기독교 외원단체의 구호활동,” 111. 재인용.


글 | 장금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로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고, 세계사이버대학 교목실장과 한민족연구소 소장, 명지대학교 사목으로 사역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역사 관련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