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을 통해서 본 하나님의 은총

6·25전쟁을 통해서 본 하나님의 은총

2020-06-07 0 By worldview

월드뷰 06 JUNE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5


글/ 배영복(도곡 현대사연구소 대표)


개요


6·25전쟁이 발발한 지 벌써 70년이 지났다. 전쟁 중에 태어난 2세가 올해 70세가 되었고, 전후 3세대, 4세대가 한국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성경에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란 말이 있다(삼상 17:47). 전쟁은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셨지만, 40년 동안이나 광야 생활을 통해, 아말렉, 아모리, 블레셋 등 이방인과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하는 고통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마다,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역사하셨다.

6·25전쟁 때에도,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셨다는 사실이 수없이 나타났다. 그 결과 우리는 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오늘날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 있다.


6·25전쟁의 역사적 팩트


6·25전쟁이란,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이 소련 탱크 242대를 앞세워 불법으로 남침하여, 3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르고,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민족 상쟁의 비극을 말한다. 국군 62만 명이 전사, 부상, 포로 등으로 희생됐고, 민간인도 99만 970명이 희생되었다.

전방부대 군인 중 1/3을 휴가나 외출을 보내고, 전투 장비도 후방으로 정비 보내는 등 전투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적인 남침을 받았으므로, 남침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한 달 만에 국토의 90%를 빼앗겼다. 8월 1일 국군은 낙동강까지 철수하여 남은 것은 대구와 부산뿐이었다. 낙동강을 방어하지 못하면, 나라를 잃고 패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다.

전쟁 초기 미군의 참전도 허사였다. 탱크도 없이 선발대로 들어온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패한 이후,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계속 수세에 몰려 대전을 빼앗기고, 대구 근방 왜관까지 밀려 내렸다. 국군과 유엔군은 대구와 부산을 지키기 위해, 왜관- 의성- 포항을 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철통같은 방어에 들어갔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을 방어하고 있는 동안,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고, 마침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파죽지세로 북진하였고, 공산군은 혼비백산하여, 북쪽으로 철수했다.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고, 10월 1일 38선을 돌파했으며,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다. 10월 26일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3년 동안 전쟁은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전쟁에 개입하시고,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다는 증거를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기적’,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 기적: 첫날, ‘전쟁 소식’ 미국이 먼저 알고 대처


기적은 전쟁 첫날부터 나타났다. 즉 전쟁 발발 소식을 한국 정부보다 미국이 먼저 알았고, 한국보다 먼저 한국전 대비태세에 들어갔다. 참으로 신기하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북한은 6월 25일, 새벽 4시, 서해 최북단 옹진반도에 포격을 시작했다. 이때 옹진반도에는 한국군 17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평소와 달리 수많은 포탄이 날아와 병력의 1/3이 전사했다. 전쟁이 시작된 것을 직감한 미 군사고문관이 전쟁 발발 소식을 무전으로 미 대사관에 전했다. 무초(John J. Muccio) 대사는 전쟁 소식을 보고 받고, 즉시 사무실로 가기 위해 미 대사관이 있는 을지로 입구 반도호텔로 향했다. 호텔 앞 도로를 건너는 순간 UP 통신의 잭 제임스 기자를 만났다.

“대사님, 일요일 아침 일찍 어딜 가십니까?”

“나 급해. 38선에 전쟁이 터졌어…!”

이 짧은 대화 한마디가 전쟁 소식을 세계에 전파한 것이다. ‘전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기자는 특종이라는 생각을 하고, 즉시 호텔 1층 기자실로 들어가 “한국전쟁 발발” 기사를 동경지국으로 타전했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전쟁 발발 소식을 제1탄으로 급전하고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전하기로 했다.

이 긴급 뉴스가 뉴욕을 거쳐 워싱턴으로 전파되면서, 워싱턴 정가는 발칵 뒤집혔다. 미국 워싱턴 현지 시각 토요일 오후 8시 50분(한국시각 일요일 오전 9시 50분), 전쟁 소식을 접한 러스크 국무장관은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한편,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아직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전이다. 한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10시 30분에 보고됐는데, 이는 미국보다 40분이나 늦었다. 한국 국무회의는 오후 2시에 소집됐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을지로 입구 도로 위에서 기자가 무초 대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전쟁 소식은 하루 뒤에나 나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주일은 모두 휴식에 들어가 쉬기 때문이다. 도로 위에서 기자를 만난 10초 동안의 짧은 만남이 기적을 낳은 것이다. 토요일 밤에 전쟁 소식이 들려오자, 미 당국은 재빠르게 움직였고, 바로 전쟁 대비태세에 들어갔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순간의 만남이, 6·25전쟁을 승리로 역전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만일 월요일에 회의를 소집했다면, 미군의 참전은 그만큼 늦어졌고, 공산군은 승기를 잡았을 것이다.


두 번째 기적: 안보리 소집에 소련 대표 불참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오후 2시에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 회의에 거부권을 가진 소련 대표 말리크(Yakov Aleksandrovich Malik)가 불참했다. 소련 대표가 불참함으로써, ‘거부권 없이’ 북한을 침략자로 규탄하고, 유엔 회원국들에 참전을 요구할 수 있었다.

외교가에서는 소련 대표가 불참한 이유에 대해 모두 궁금해했다. 교통사고, 배탈 등의 추측이 난무했지만 모두 틀렸다. 비밀문서에 의하면 1950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 고트발트(Klement Gottwald)가 스탈린(Joseph Stalin)에게 물어봤더니, 스탈린은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할 것이고, 미군이 한반도에서 중공군과 싸우고 있는 동안, 소련은 유럽을 침공하여 공산주의를 확대하겠다고 했다. 스탈린은 크게 착각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하면서, 유럽에서 또 다른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스탈린이 착각하도록 인도하시고,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역사하신 이가 곧 하나님이시다.


세 번째 기적: 침략군을 서울에서 멈추게 하심


북한 공산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6월 28일 11시 30분경,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 광화문에 나타났다. 국군이 모두 후퇴한 상황이었으므로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 시민들도 침략군에 대해 별로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공산군이 서울 점령 후 계속해서 남하하지 않고 휴식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당시 국군은 파죽지세로 밀리고 있었으며, 희생된 군인이 많아, 건재 부대를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했다.

만일 공산군이 전투를 중지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내려갔다면, 적화통일이 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왜 서울에서 3일 동안 쉬었느냐 하는 점이 의문이다. 또 전투 재개 명을 받고 부서진 한강 다리를 보수해서 작전을 전개하는 데에 3일이 더 걸려, 6일 후에나 전투가 시작됐다. 그동안 국군은 패잔병들을 모아, 부대를 재편성 할 수 있었고, 미군도 부산에 상륙하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즉 북한은 적화통일의 골든 타임을 놓친 것이다. 이는 박헌영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을 중심으로 서울 시민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적화통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평소에 말해온 것을 김일성도 믿었고, 스탈린도 믿은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탈린이 ‘한강을 넘지 말라’고 지시했고, 김일성은 그 명령을 따르다가 통일에 실패했다. 이 간단한 스토리도 역시 우연이 아니요, 한국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다.


네 번째 기적: 중공군을 수원에서 멈추게 하신 하나님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을 때, 중공군이 참전하여 인해전술을 쓰는 바람에,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내주고 오산까지 후퇴했다. 중공군은 1월 3일 서울을 점령하고, 1월 10일 수원까지 내려왔으나, 갑자기 남하를 정지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이때 미국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 철수를 신중하게 검토하던 중이었다. 12월 23일 순직한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26일에 새로 부임한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장군에게는 철군을 준비하라고 명령까지 내린 상태였다. 중공군은 조금만 더 밀고 내려가면, 미군이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할 계획이었는데 왜 갑자기 정지했는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리지웨이 장군의 처지에서 보면 중공군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철수 명령을 받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장군은 철수할 때 하더라도 중공군의 전의를 살피기 위해, 여단급 전투단을 편성하고 수원까지 위력수색을 시켰다. 그런데 수색대가 수원까지 가는 동안 중공군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리지웨이 장군은 ‘아, 여기까지가 중공군의 능력이구나.’라고 판단하고, 즉시 반격에 들어갔다. 유엔군은 단숨에 38선까지 밀고 올라갔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기적을 보게 된다. 하늘에서 봤을 때, 중공군을 멈추게 하고, 미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연출하신 것이다. 여호수아 군대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여호수아 군대가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 군대가 이긴 장면과 같다.


다섯 번째 기적: 이승만과 함께하신 하나님


전쟁이 장기화하자, 미국은 휴전을 원했다. 중국과 소련 그리고 북한도 원했다. 1951년 7월 10일 시작된 휴전회담이 장기화하면서 미국도 지쳤다. 공산 측과 제반 문제가 거의 합의가 이루어진, 회담 2년이 지나간 무렵, 이번에는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을 강력히 반대했다. “휴전 반대, 북진통일”이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이었다. 미국은 좋은 조건을 내세워 이승만을 설득하려 했으나, 이승만은 오히려 반공포로 석방(1953.6.18.)이라는 초강수를 두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고, 이승만의 정치력이 높게 평가되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미국 처지에서 보면 고양이가 쥐새끼한테 물린 셈이다.

미국은 마침내 이승만 제거 검토에 들어갔다. 그러나 평소 이승만의 지략과 정치력을 높이 존중해 오던 지한파들에 의해, 이 계획은 무효화 되고, 오히려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특사를 보내 이승만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승만은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전후 복구사업은 물론 차후에 대비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1953.10.1.)을 맺어 달라고 요구하고 체결시켰다. 그 결과 우리는 한국군의 현대화계획은 물론 한미동맹을 통해 70년 동안 미국의 보호 아래, 한국의 안보와 경제를 지키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놀라운 기적 같은 은혜는, 한국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세우시고 모세처럼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드리자. 이 외에도 하나님의 은총은 수없이 나타났다. 6·25전쟁은 고난 가운데서 이 민족을 살리신 하나님 은총의 역사다.

<bybs@naver.com>


글 | 배영복

육군 정훈감을 역임하였고 현재 6·25진실알리기운동본부 이사, 도곡 현대사연구소 대표,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KVMCF) 회장, 베트남선교협회 회장이다. 저서로 <전쟁과 역사>, <6·25전쟁의 진실과 비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