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국군 지휘관 1: 김백일 장군

6·25전쟁과 국군 지휘관 1: 김백일 장군

2020-06-06 0 By worldview

월드뷰 06 JUNE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4


글/ 안재철(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


김일성의 김백일 장군에 대한 증오심


6·25전쟁과 관련된 국군 지휘관 중 종북·좌익 주사파 세력의 선동으로 유독 많은 핍박을 받는 지휘관은 김백일 장군이다. 김백일 장군은 유독 북한 김일성과 악연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악연들을 살펴보면, 첫째, 간도특설대의 중대장으로 활동했던 그의 이력 때문이다. 간도특설대는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 위장된 동북항일연군 공산유격대를 추적 소탕하기 위해 해방 이전 1938년 만주국에 설치한 부대였다. 1936년 만주 지역에서 공산주의 반일무장 단체를 모두 묶어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공산혁명을 이루기 위해 결성한 동북항일연군 유격대 조직이 결성되었다.

김일성도 이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이들은 중앙의 보급품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족을 상대로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거의 마적단에 가까웠다. 김백일이 속한 간도특설대는 동북항일연군이 만주의 조선족을 약탈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많은 전투를 벌였으니, 김일성이 김백일을 증오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간도특설대와 명칭이 비슷한 간도토벌대가 있었다. 이는 일본군이 독립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종북·좌익 주사파 세력은 일본이 만든 간도토벌대를 간도특설대와 같은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엄연히 다른 부대였다. 김백일이 간도특설대에 있던 1940년대 당시에는 중국공산당이 한국독립군에게 공산당 편입을 강요하자, 독립군은 이미 중국 땅으로 옮겨갔고, 임시정부조차 중국 중경(重慶)에 가 있었다. 즉 간도토벌대는 간도특설대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없어졌는데도, 이를 같은 것인 양 교묘히 묘사하고 있다. 더군다나 만주에서 마적단처럼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이 되면서 조직이 무너져 300명 정도가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하게 되었으니, 김일성이 김백일을 증오하지 않았겠는가? 만주국에서 동북항일연군이 무너지자 간도특설대는 중국공산당의 공산혁명을 위한 항일무장단체 팔로군(八路軍)과 싸우게 된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주에서 마적단처럼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이 무너져 소련으로 도망간 김일성은 1942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소련군의 극동전선군 88여단의 남야영 중대장이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전승국으로 소련이 북한 지역에 진주했을 때 소련 공산 정권을 등에 업고 북한의 정권을 장악하는 기이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1950년 10월 1일 동부전선 강원도 양양에서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국군 3사단 23연대 3대대 지휘관과 미 군사고문단이 기념 표지판 주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일자: 1950년 10월 1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38선 통과와 통일의 염원을 담은 북진.
6·25전쟁이 시작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최초로 38선을 통과, 통일의 염원을 안고 북진을 시작한 것은 1950년 10월 1일 동부전선 강원도 양양에서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군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하고 국군의 사기를 높이고자 1956년 9월 4일 대통령령 제1117호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했다.
일자: 1950년 10월 1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국군 1군단 예하 3사단 병사들은 도보로 한반도 북동부 지역의 원산을 항해 북진하였다. 강원도 통천 북쪽에 있는 마을인 고조에서 12.8Km 북방에 있는 마을 주민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북진하는 국군 3사단 병사들을 환영하고 있다.
일자: 1950년 10월 7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둘째, 1945년 해방이 되자 김백일은 함경북도 명천군으로 돌아왔는데, 공산 정권을 만들고 무력 통일을 준비하던 김일성은 김백일의 군 경력을 알고, 북한 공산군 창설을 위해 “나와 같이 인민군을 하자. 미군 놈들을 몰아내고 미군에게 붙어먹는 민족 반역자를 싹쓸이해야 통일이 된다.”며 권총을 꺼내 들고 위협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미 공산주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김백일은 공산당에 가입할 수는 없었기에, 몰래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왔다.

셋째, 남한에서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후, 1948년 10월 국군 내부에 잠입한 공산주의자들이 국군 14연대 여순반란사건을 일으키자, 국군 제5여단장으로 반란군을 진압했던 인물이 김백일이다. 이러하니 여순반란사건을 민주화를 위한 인민혁명인 양 위장을 하는 종북·좌익 주사파 세력이 김백일을 증오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1949년 10월에는 지리산으로 숨어든 여순반란사건의 잔당을 3개월에 걸쳐 토벌해 6·25전쟁이 발발하면 후방 교란을 노리던 북한 공산당의 계획을 좌절시켰으니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철천지원수나 다름 없었다.

넷째,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고 한반도 적화통일의 꿈을 완성하기 직전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가장 먼저 1950년 10월 1일에 38선 넘어 북진한 부대가 바로 김백일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 육군 1군단 소속의 3사단이었고, 국군 1군단은 함경북도 청진과 길주 갑산 지역까지 깊숙이 북진하여 북한 김일성 공산당은 거의 궤멸하는 순간까지 몰렸었으니, 김일성의 김백일 장군에 대한 증오심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처럼 김백일 장군을 핍박하는 사람들의 배후에는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는 종북·좌익 주사파 세력이 있다. 김백일 장군은 김일성과 악연인 군인이었기 때문에 6·25전쟁 당시 맹활약한 국군 지휘관 중 종북·좌익 주사파 세력의 선동으로 갖은 수모를 당하는 지휘관이 되었다.

해방된 함흥시민의 환영식 – 공산군에서 해방된 함흥시민이 모여,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반도 북동부로 진격한 미 육군 10군단의 에드워드 앨몬드 소장에게 축하와 감사의 꽃다발을 전달했다.
일자: 1950년 10월 24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함경북도까지 북진한 국군 수도사단 26연대 병사들이 새로 보급된 방한복을 입고 사정리 마을에서 행진하고 있다.
일자: 1950년 11월 25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흥남항을 출항하여 동해에 접한 강원도 묵호로 떠나려는 국군 수도사단 병사들이 운집해 있다.
일자: 1950년 12월 16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6·25전쟁 당시의 활약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 방어선이 붕괴하자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옮겨지고, 김백일 육군 작전참모부장은 피해가 큰 국군을 재편성하여 8개 사단을 5개 사단으로 축소하고 국군 최초의 군단을 창설했다. 낙동강 동부전선에서 군단장으로 임명받아, 북한군 2개 사단을 격멸시키고 동부전선을 사수하였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던 유엔군과 국군은 9월 22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시작하였다. 김백일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여 1950년 10월 1일 국군 제1군단 3사단이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했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는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했다.

흥남항을 출발한 국군 1군단 병사들과 보급품이 강원도 묵호항(지금의 동해시)에 도착하였다.
일자: 1950년 12월 18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중공군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국군 3사단 23연대의 지휘 아래 군사훈련을 받는 함경북도 길주 출신의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일자: 1950년 12월 26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함흥 시민 환영 행사에 앞서 미 10군단장 앨몬드 소장이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에게 미국 정부의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일자: 1950년 11월 22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이어서 제1군단 산하 수도사단과 3사단의 협공으로 10월 11일 원산을 탈환했다. 미 10군단 예하의 미 해병 1사단이 10월 26일에야 원산상륙작전을 했는데 도보로 북진을 해서 이미 함경남북도 전역에 진격했던 김백일 장군이 지휘했던 국군 1군단의 활약은 놀라운 일이었다.

김백일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군단은 원산에 이어, 함흥-청진-길주-갑산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제 우리의 소원이던 국토통일을 눈앞에 두게 됐습니다. 그러한즉 우리는 잃었던 국토 위에 우리 스스로의 힘과 얼로써 훌륭히 정치해 나갈 수 있는 채비를 해야만 하는 것”이라며 함흥을 찾아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중공군 2차 공세로 한반도 북동부 전선에 북진하였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갑작스러운 철수를 하였다. 많은 이들이 국군 1군단의 노력으로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란민 철수를 반대하던 미군이 피란민 철수 결정을 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월드뷰 3월호 참고)을 당시의 미군 작전 일지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과의 전통문을 통해 밝혔다.

흥남철수 후 묵호항(지금의 동해항)에 도착한 국군 1군단 병사들을 격려하는 1군단장 김백일 소장
일자: 1950년 12월 19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미 10군단장 앨몬드 소장에게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전황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자: 1951년 2월 14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국군이 철수할 때, 함경북도 출신의 학도병이 156명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3일의 약속’ 주인공들이다. ‘3일의 약속’이란 국군 1군단 예하 국군 3사단이 함경북도 길주까지 북진하였을 때, 학도병으로 국군 3사단에 자원입대하였던 병사들이 갑작스레 국군이 철수하게 되자 함경북도 성진항에서 국군 수송선으로 함께 철수하게 되었고, 3일 만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어머니한테 약속하고 떠났던 것을 상징한다. 당시에 유엔군과 국군의 전력이 워낙 강했기에 갑작스러운 중공군의 출현으로 전세를 잠시 추스르고 3일 안에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이렇게 다시 강원도 지역으로 철수한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고 다시 북진하던 와중에, 중공군 춘계공세에 맞서 1951년 3월 28일 경기도 여주 미 육군 10군단 지휘사령부에서 작전 회의를 마치고 국군 1군단 사령부로 돌아가는 도중에 악천후로 강원도 대관령 인근의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전사하고 말았다.

국군의 큰 별이 졌다고 애통해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김백일 장군을 육군 중장으로 추서하였고, 다음과 같은 위로문을 발표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6·25전쟁 당시 지휘관으로서 김백일 장군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장군의 유일한 목적은 언제나 변함없이 남북을 통일해서 국권을 회복하는 데 있었으니, 김 장군을 사랑하는 우리로서는 그 정신을 받들어 같은 결심으로 끝까지 용감하게 싸워 김 장군이 다 이루지 못한 역사를 완성하기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mv14000@gmail.com>


글 | 안재철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현재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6·25 한국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