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의 영광과 쓴잔
2020-06-05
월드뷰 06 JUNE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3 |
글/ 정일화(한미안보연구회 이사)
뒤죽박죽의 한강
세계전쟁사를 보면 어느 전쟁이든 승패 곡선을 그리지 않은 전쟁은 없다. 운이 따르고 준비된 계획이 착착 들어맞는 승리의 곡선을 탈 때는 지휘관의 별이 번쩍거린다. 반대로 계산이 잘못되었거나, 전세가 기울어질 때, 지휘관의 별은 흙색이 된다.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남침,, 27일 서울이 적 탱크의 바퀴에 깔리게 되는 순간, 그리고 3일간 인민군이 서울을 들쑤실 때를 돌아보면, 군은 지휘관이건 병사이건 모두 죽은 목숨과 같았다. 세계전쟁사에서 3일 만에 적에게 수도를 점령당한 전쟁은 없었다.
전쟁 발발 70년이 지난 지금은, 좀 냉정하게 당시를 관찰할 수 있다. 북한 인민군은 소위 김일성 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인 1946년부터, 소련군사훈련단에 의해 남침을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남침 1년 전인 1949년에는, 모택동의 중공군으로 장개석 군대에 대항해 싸운, 8로군 출신의 조선인 사단 5개가 입북했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T34 전차와 122mm 거포를 추가로 지원받아, 완벽한 남침 준비를 했다. 지금까지 인민군의 T34 전차 1백50대와 전투경험이 풍부한 중공군 출신 사단을 내세우면, 한국군의 초기 패배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서울 문산의 국군 1사단, 강원도의 6사단이 3일간 버틴 것은 기적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모든 전쟁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적은 병력과 취약한 무기로도 승리할 수 있으며, 많은 병력과 우수한 무기를 갖고도 패배하는 경우도 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국군도 상당한 수준의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육군 8개 사단(6만7천4백 명)과 지원특별부대(2만7천6백 명)의 지상군 병력, 해병대 2개 대대(1천9백 명), 그리고 약간의 해군 공군력으로, 총 10만5천7백 명의 병력이 있었다. 화력도 미군으로부터 이양 받은 탱크 장갑차 27대, 105mm 곡사포 91문, 박격포 81mm 384문, 60mm 576문, 57mm 대 탱크포 140대 등 신생국으로서는 상당 수준이었다.
문제는 전쟁이 터지기 1주일 전, 육군본부가 장병의 모내기 휴가 지시를 내려, 3분의 1 또는 거의 절반 수준이 부대를 떠났고, 나머지 잔류 병력도 휴가 기분으로 병영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육본은 또한 전 부대에 무기검열지시를 내려 대포 및 차량 대부분이 영등포 조병창으로 이동해 있었다. 후일 잘 싸운 군대로 지목된 춘천의 6사단(사단장 김종호 대령)과 문산의 1사단(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있다가, 적의 침략을 받아 3일을 버티는 전과를 올렸다.
1사단 사단장 백선엽은 “적 전차 T34가 105mm포를 정면으로 맞을 때 뒤뚱거리며 작동 안되는 것을 봤다.”라고 진술했다. 당시 국군의 2.35인치의 대 전차포가 T34를 뚫지 못한 것 때문에 패배했다는 말은 정당화할 수 없다.
6·25 얼마 전까지 1사단장을 맡고 있던 김석원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군 지휘부는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북한과의 밀무역에 개입하고 있었고, 1사단 지역에서 한국의 군수물자를 빼내기 위해 북한에서 보낸 명태 20트럭분을 압수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김석원과 채병덕 참모총장은 옷을 벗었으나 채병덕은 곧 총장으로 복귀했다. 채병덕은 참모총장으로 복귀했으나 6·25 발발로 허둥대다가 7월 1일 자로 면직되고, 서남편성군사령관이라는 직함으로 하동 전선에서 전사했다. 명태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6·25 직전의 장병휴가, 대포, 트럭 등 중요 화력의 영등포 병기창 이동 등 6·25 발발 이전에 있었던 명백한 국가 이적행위에 대한 문제는 이후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1)
한강대교가 28일 이른 새벽 끊어졌다. 후퇴하는 국군과 장비는 아직 전선이나 서울 외곽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많은 국군과 군사 장비는 바로 인민군에게 넘어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병력이 나룻배나 헤엄을 쳐서 거의 맨손으로 한강을 넘어왔다.
맥아더의 전쟁 구상
6월 29일 맥아더 원수가 전용기를 타고 수원에 내려 한강 변으로 나왔다. 한강 변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수원 가도에서 인민군 Yak기의 기총소사를 받았고, 타고 온 전용기도 적기의 공격을 받았다. 전투지에서 적의 소총을 맞아본 경험이 있으면서 원수계급에 이를 때까지 전쟁터의 삶을 산 경험이, 벼랑 끝에 선 대한민국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
첫째, 그는 한강 변 시찰현장에서, 워싱턴의 명령을 무시하고 대동한 스트레이트마이어(George E. Stratemeyer) 공군 사령관에게 38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는 38선 이남에서만 공군력 사용을 국방성으로부터 허락받고 있었는데, 전장을 눈앞에 보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미군 B29는 평양비행장으로 날아가 전투준비를 하고 있던 전투기들을 지상에서 때려부셨고, 7월 3일에는 미국 항공모함 밸리 포지(Valley Forge)와 영국 항모 트라이엄프(Triumph)가 서해안 38선을 넘어 해주 비행장과 평양 비행장에 무자비한 폭격을 퍼부어, 지상에 세워놓은 항공기는 물론 격납고, 기름 탱크, 활주로를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었다. 북한공군력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만들었다. 7월 14일에는 원산 정유시설을 폭격해, 남쪽으로 가는 휘발유 공급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둘째, 이 전쟁은 미국 지상군이 들어오지 않고는 대항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후, 어떻게 워싱턴을 설득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당시 미국은 2차 대전의 승리감에 젖어 군비와 군사력을 형편없이 줄이고, 징집령도 해제했다. 원자탄을 독점하고 있다는 자신감과 지역 문제가 발생하면 유엔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맥아더 원수는 전장 관찰을 근거로 일단 육군 1개 연대만 동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워싱턴에 청원했다. 트루먼(Harry S. Truman)은 당장 승인했다. 이후 맥아더는 워싱턴을 설득하여 극동군 사령부 예하의 8군 전체와 본토 지원군까지 받아냈고, 해군 제7함대와 막대한 공군력 사용을 허락받아 대한민국 방어전을 전개했다.
셋째는 이 전쟁은 바로 치고 받아서는 손실이 크리라 판단하고,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다가 인천에 상륙하여 인민군의 중앙보급선을 끊어버리고, 그대로 북진하여 통일 정부를 이룬다는 계획을 구상했다.
이승만과 맥아더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5일 오전 10시경, 신성모 국방장관의 보고를 받았고, 이어 워싱턴에 있는 장면 주미대사를 전화로 불러 미국에 전쟁 발발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방 장관이 전황을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탱크가 문제인데 이를 어떻게 하나!”라고 말했다. 6월 25일 일요일에 국무회의가 열렸고, 국회를 열어 사태를 토의하며, 부산한 전쟁 첫날을 보냈다.
맥아더와 연결된 것은 이튿날이었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드디어 전쟁이 터졌다고 말하고, 미국이 한국에서 24군단을 철수해 갈 때, 중무장을 두고 가라고, 한국이 그렇게 요청했는데도 미국이 그냥 가버렸고, 그 틈을 이용해, 드디어 북한이 남침했다고 말하면서, 신속히 대한민국을 도울 것을 요구했다. 맥아더와 이승만은 맥아더가 필리핀 사령관으로 있을 때부터 친교가 있었다. 이승만은 맥아더 같은 뛰어난 인재가 동양에 있는 한, 언젠가 한국의 독립을 돕게 되리라 생각하고, 편지와 논문을 보내는 등 상당히 신경을 썼다. 맥아더도 일본이 패망하자, 그해 10월 이승만을 극동군 사령관 전용기를 태워, 한국에 보내는 등 극진한 대우를 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날, 맥아더는 맨 먼저 축하객으로 중앙청을 방문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 서울을 탈환하자, 국무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승만에게 즉각, 수도 서울을 반환하는 예식을 중앙청에서 거행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신중했다. 전쟁이 났을 때 유엔 결의로,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한국에 들어온 영국군 등 각국 군이 작전통제권을 맥아더에게 넘겼으나, 이승만은 열흘을 머뭇거린 후, 소위 대전협정으로 “이 전쟁이 계속하는 동안”이라는 조건을 달아 뒤늦게 이양했다.
1950년 9월 28일 맥아더는 서울을 탈환했을 때, 국무성으로부터 수도행정권을 당분간 이승만에게 넘기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맥아더는 바로 그날 중앙청에서 반환식을 하고, 이승만에게 수도통치권을 이양하는 예식을 거행했다. 이승만은 이양식을 마치고 동경으로 돌아가는 맥아더를 붙잡고, “장군, 당장 38선을 넘어 진격해야 하오.”라고 말했다. 고마움은 고마움이고 국가 사정은 국가 사정이라는 것이 이승만의 철학이었다.2)
한국전쟁에 들어온 유엔군 고급지휘관들은 하나같이 2차 대전을 통해 전장에서 살아남은 맹수 같은 인물들이었다. 맥아더가 그렇고, 월튼 워커(Walton Harris Walke) 8군 사령관, 조이(Charles Turner Joy) 제독, 스트레이트마이어 공군 사령관, 각 사단장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국군지휘관들 모두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을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하버드, 프린스턴 명문대 출신의 위엄을 갖고 전시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엄중하게 수행했다.
낙동강 전선의 지휘관들
낙동강 방어선은 인민군이 밀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유엔군이 인민군 공격을 끌어들이면서 만든 선이다. 낙동강과 험한 산줄기를 잇는 부산-대구방어선은 준비 없이 당한 국군과 유엔군이, 병력과 무기가 우수한 인민군을 긴 후퇴 길을 통해, 힘을 빼고 어깨를 바싹 붙여 방어 간격을 좁히기 위한 구상의 결과였다.
유엔군 지상 사령관 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2차 대전 때 유럽 전선의 미 3군 예하 20군단장으로 2개의 전차사단, 1개의 기계화사단, 그리고 유럽전선 최강의 80보병사단 등 3개 보병사단을 거느린 유령군단장으로 유명했다. 거대한 병력을 하루에 50km 이상 유령처럼 이동시키면서 종횡무진으로 독일군을 형편없이 깨뜨린 공훈을 세웠다. 그는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잘 버티는 독일 방어군의 전략 전술을 유심히 관찰했다. 유명한 메츠(Metz)포위 작전, 벌지(Bulge)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관찰한 것은, 독일군은 미군이 강하게 밀어붙이면 배를 깔고 조용히 있다가 미군이 한가롭다고 보이면 강력한 공격으로 밀어붙이는 소위 적극적 방어(Active Defence)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었다.3)
워커는 7월 7일 천안 전선으로 달려가, 연대장과 대대장이 현장에서 전사하고, 미군이 형편없이 밀리는 상황을 목격했다. 지금의 병력과 무기로서는 도무지 맞설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그는 7월 13일 유엔군 지상 사령관으로 정식 임명되어, 대구에 사령부를 설치하자, 정찰기를 타고 대구-대전지역을 샅샅이 지형 정찰했다.
미군과 한국군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어깨 간격을 좁히라고 명령했다. 7월 20일까지 대전선을 지키고, 7월 말까지 낙동강선 방어선이 형성되면, 부산을 통해 들어오는 병력과 T34 전차를 잡을 수 있는 M4A3같은 병기가, 바다와 공중에서 때리는 함포, 기총소사, 네이팜과 함께 침략군을 제압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8월 1일에는 진동고개-영산-왜관-다부동-신령-영천-포항으로 이어진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을 죽어도 지켜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 “버티든지 아니면 죽어라(Stand or Die).”의 냉혹한 작전명령이었다.
미 25사단, 해병 1사단, 미 1기병사단, 미 24사단 그리고 국군 1, 6, 수도, 8, 3사단은 적과 죽음의 전투를 치러 서로의 시체가 낙동강 7백 리와 전투 산악을 덮었다. 3~5척의 항공모함과 수백 척의 순양함 구축함은 바다에서 육지로 함포를 쏘아대고, 미5 및 13공군의 2천 대 전투폭격기도 쉼 없이 폭격했다. 고지의 주인이 밤낮으로 바뀌었다.
중요방어 요새인 영산지구, 다부동, 마산 진동고개가 위기를 맞을 때 119 소방팀처럼 달려가 성공적으로 위기를 막은 미 27연대 마이켈리스(John H. Michaelis) 대령의 업적은 세계 전사상 보기 드문 찬란한 공적이었다. 다부동 전선을 뚫고 가장 먼저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북진에 성공한 국군 1사단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은 후일 국군과 유엔군 중 평양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공을 세웠다.
낙동강 방어 성공하자 인천상륙으로
워커의 “Stand or Die” 명령이 결국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고 있을 때 맥아더는 아직 전선이 불안한데도 미 25사단, 미 1해병사단, 국군 17연대, 한국해병대를 전선에서 빼고 일본의 미 제7사단을 합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대성공이었다.
중공군 공격으로 순천-평양 후퇴 길에서 본대를 이탈하여 죽음의 계곡을 도망쳐 나온 미 2사단 23연대장 프리먼(Paul L, Freeman) 대령은 ‘연대를 살리기 위해 전선을 이탈하는 것’과 ‘명령을 따르기 위해 뻔한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가?’의 시비에 휘말렸다가, 뒤에 지평리 전투에서 승리해 일약 전쟁영웅이 되었으며, 뒤에 4성 장군까지 진급했다.
국군 2군단(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2차 중공군 공세 때, 중공군 침투를 막지 못해, 2군단 와해는 물론 이웃 미 1군단 후방으로, 중공군을 침투하게 해, 미군까지 중공군 포위망에 갇히게 했다. 다시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에 의해 와해되자,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사령관은 부대를 해체해 버렸다. 밴 플리트 사령관 자신은, 모든 국군을 재훈련시켜 전투력을 끌어올리고, 국군 20개 사단의 증설에도 최선을 다한 대한민국 국군의 진정한 친구였다.
<jcolumn@naver.com>
1) 김석원, <노병의 한>(육법사, 서울) pp. 250~272.
2) 정일화, <휴전회담과 이승만>(선한 약속, 서울) pp. 291~300
3) Wilson A. Heefner, Patton’s Bulldog: The Life and Service of General Walton Walker(White Mane Books, Pensylvania), pp. 115~125
글 | 정일화
서울대, 미국 남가주대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 경기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정치학 박사로 현재 한미안보연구회 이사이다. 저서로 <맥아더의 한국전쟁>,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 하우스만>, <휴전협정과 이승만>, <대한민국 독립의 문 카이로선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