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이승만 전쟁
2020-06-04
월드뷰 06 JUNE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 |
글/ 남정옥(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도서연구실장)
6·25전쟁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 그때는 주한미군도 철수하고 없었다. 다만 국군의 훈련을 책임질 비전투요원인 미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아 있었다. 북한은 그런 기회를 틈타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위급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였다.
전쟁은 처음부터 대한민국에 불리했다. 군사력 면에서 대한민국은 북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현대전에 필수적이라고 할 전차와 전투기를 국군은 단 한 대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북한은 전차 242대와 전투기를 포함한 각종 항공기 226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상 전투의 꽃이라고 할 포병 화력도 국군이 절대 열세였다. 북한군은 자주포를 포함하여 각종 대포 748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군은 북한군 포병보다 1/8에 불과한 91문만 보유하고 있었다. 포병 사거리도 북한군이 12km인데 비해 국군 포병은 그 절반에 해당하는 6km였다. 병력도 국군은 10만 명으로, 북한군 20만 명의 절반밖에 안 됐다. 전쟁은 처음부터 국군이 질 수밖에 없는 조건들로 가득 찼다.
북한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우고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를 기해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과 전력의 열세 속에서 기습 남침을 받은 국군은 그런데도 잘 싸웠다. 북한군은 남침할 때 전쟁 개시 2일 만에 서울을 점령할 계획이었으나, 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전쟁 개시 4일째인 28일에야 서울을 점령했다. 국군은 열세한 상황에서 이틀을 더 선방(善防)한 셈이다.
Ⅰ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의 남침 초기 막강한 전력 상황을 보고 “비록 제갈공명이 지휘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비감해 했다. 이승만은 6·25전쟁 이전 그런 상황을 예견하고 미국에 전투기를 비롯하여 전차와 대포를 제공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으나, 미국은 그런 무기들은 공격용이기 때문에 한국에 제공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승만은 그럼 북한이 남침하지 못하도록 상호방위조약을 맺거나, 그것도 어려우면 단 1명의 미군이라도 좋으니 미군을 주둔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은 그것도 거절했다. 이에 이승만은 그럼 북한이 남침하면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다는 선언만이라도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국은 그것마저 거절했다. 6·25전쟁은 그런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을 받았다.
북한 남침 후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시간문제로 봤다. 국군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더구나 국군이 혼자의 힘으로 이 난국을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의 도움 없이는 대한민국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어느 때보다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다. 이승만은 미국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명문대학(조지워싱턴대학 학사, 하버드대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 박사)을 나온 국제정치학자이자 전략가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40년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와 막강한 국력 그리고 미국헌법과 역사를 꿰뚫고 있었다. 나중에 유엔군 사령관이나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왔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비롯하여 워커(Walton H. Walker)·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클라크(Mark Wayne Clark) 장군이 약소국인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던 이유도 미국의 헌법과 역사를 인용하며 그들을 명분 있게 설득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부터 미국에 대해 ‘민주주의의 오아시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대한민국이 건국한 뒤에는 “대한민국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는 미국뿐이다.”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남침은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이승만의 일생에서 최대의 시련이었다. 이승만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미국을 활용한 그의 ‘용미외교(用美外交)’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용미외교 중심에는 대한민국의 생존과 국가이익이 있었다. 이승만은 전쟁 기간 내내 대한민국을 살리고, 국군의 전력을 증강하고, 나아가 북진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른바 대한민국을 구할 거대한 전시외교 행보였다.
Ⅱ
이승만의 전시외교는 전쟁 당일(6월 25일)부터 숨 가쁘게 전개됐다. 그날 오전 이승만은 무초 주한미국대사를 경무대로 불러 “무기가 부족하니 국군에게 더 많은 무기와 탄약을 지원해 달라. 우리 국민은 모든 남자와 어린애까지도 막대기나 돌멩이를 들고서라도 싸우겠다. 이 위기를 한국이 통일할 절호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워싱턴 주재 장면(張勉) 대사를 통해 미국과 유엔에 한국지원을 요청할 것을 지시했다.
유엔에서는 한국을 군사적·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대한(對韓) 결의안이 유엔 안보리에서 통과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유엔회원국이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할 수 있게 됐다. 유엔회원국의 참전으로 장차 한국에 파견될 유엔군을 총지휘하게 될 유엔군사령부 창설도 유엔 안보리에서 가결됐고, 초대 유엔군 사령관에 맥아더 원수가 임명됐다. 이승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함으로써 국군을 유엔군의 깃발 아래 싸울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엔 비회원국인 대한민국이 유엔의 ‘준회원국’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이승만은 6·25전쟁을 통해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그것은 이승만이 37개월간의 6·25전쟁을 통해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며 국익을 위해 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승만은 전선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망명정부를 단호히 거절했다. 미국은 국군이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으로 밀렸을 때, 치열한 낙동강 전선에서 대구의 관문인 영천이 빼앗겼을 때, 또 중공군 개입 후 1·4후퇴를 했을 때,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이승만에게 한국의 망명정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때마다 이를 거절했다. 이승만은 전선이 낙동강으로 밀릴 때 제주도로 정부 이전을 요청한 무초(John J. Muccio) 대사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무초 대사는 기겁하며 도망을 갔다.
Ⅲ
이승만은 전시에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였다. 그것은 북진통일과 국군의 전력증강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도움으로 국군의 전력증강을 달성했다. 전시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군 사단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했고, 전쟁 이전 단 한 대도 없던 전차와 전투기도 확보해 현대전을 치를 수 있는 국군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전쟁 이전 미국이 그렇게 반대했던 한미동맹, 즉 한미상호방위조약도 체결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공군 개입 이후 휴전정책으로 돌아섰던 미국에 휴전을 받아들이면서 얻어낸 최대의 외교적·군사적·안보적 성과가 바로 한미동맹이었다. 중공군 개입 후 미국은 휴전정책을 고집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체결하지 않은 대신, 한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국군의 전력을 증강하는 선에서 종결지으려고 했다.
이승만은 그것은 ‘제2의 6·25남침’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판단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이승만은 한미동맹을 위해 벼랑 끝 전술을 택했다. 미국에 휴전의 최대걸림돌이었던 반공포로석방을 독단으로 단행하고, 유엔군에서 국군을 철수시켜 단독 북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 워싱턴에서는 “이승만의 그런 행위를 미국의 등에 칼을 꽂는 배신행위”라고 비난했고, 나중에는 그런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한국에 이승만을 대신할 반공지도자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승만이 요구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휴전 후 오늘날까지 북한이 6·25와 같은 전면전을 벌이지 못하는 것은 이승만이 목숨을 내걸고 얻어 낸 한미동맹 때문이다. 70년 전 이승만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 민족 최대의 위기라고 할 6·25전쟁의 위기상황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휴전 후 대한민국이 번영할 수 있는 한미동맹을 얻어 낸 20세기 위대한 국가지도자였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전시 역할과 활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겠다.
<yalu5812@hanmail.net>
글 | 남정옥
단국대학교에서 미국현대사를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20여 년간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며 6·25전쟁사, 한미군사관계사,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관련 저서 30여 권과 논문 50여 편을 썼다. 현재 박정희대통령기념관 도서연구실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