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과 전쟁 지연의 이유

6·25 한국전쟁과 전쟁 지연의 이유

2020-05-21 0 By worldview

6·25 한국전쟁과 전쟁 지연의 이유: 자유세계의 인도주의


월드뷰 05 MAY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1


글/ 안재철(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


6·25 한국전쟁 네 단계 분류


1950년 6월 25일 철저하게 전쟁 준비를 완료한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맺어지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일반적으로 6·25 한국전쟁을 주로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단계는 1950년 6월 25일 ~ 1950년 9월 중순으로, 전쟁 준비가 전혀 없었던 미군이 중심이 된 유엔군과 국군은 북한 공산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낙동강 전선(부산 방어선)까지 밀렸으나, 낙동강 전선을 필사적으로 사수하여,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발판을 만들었던 시기였다.

둘째 단계는 1950년 9월 중순 ~ 1951년 12월 말로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회복한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낙동강 전선에서도 북한 공산군을 밀어내고, 마침내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넘어 한중(韓中) 국경선인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다.

셋째 단계는 1950년 12월 31일 ~ 1951년 7월 10일까지로, 1950년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3차 공세로 유엔군과 국군은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포기하였고, 평택-안성-원주-삼척을 잇는 북위 37도 방어선까지 후퇴하였다. 그러나 유엔군과 국군은 전세를 회복하고 다시 북진하여 잃었던 땅을 되찾기 시작하면서 1951년 7월 10일에는 현재의 휴전선 인근까지 회복하였다.

넷째 단계는 1951년 7월 10일 ~ 1953년 7월 27일까지로 휴전 협상이 지연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1951년 4월 22일부터 5월 20일까지의 중공군 춘계공세가 실패로 끝나고, 유엔군과 국군은 1951년 7월 10일경에는 중공군과 북한 공산군을 현재의 휴전선 가까운 선까지 다시 북쪽으로 몰아붙였다. 이제 공산군은 유엔군과 국군을 상대로 자신들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고 깨닫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점령한 북한 영토를 더 잃기 전에 전쟁을 중단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1951년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사 자콥 말릭(Jacob A. Malik)은 유엔에서 한 연설을 통해서 전쟁을 중단하고 휴전할 것을 제안하여, 1951년 7월 10일, 38선 인근 개성에서 유엔군과 국군은 중공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휴전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포로 교환 문제로 갈등이 계속되면서 휴전 협상은 결론이 없이 지속하였다.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은 포로들의 개인 의사와 관계없이 포로들을 일괄 송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 포로들의 상당수는 공산당에 반대하고, 출신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에도 사람의 생명을 가장 우선시하는 자유세계는 공산국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공산군 포로들을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무작정 출신 공산국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휴전 협상이 시간을 끌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 국군과 유엔군,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은 장기적인 소모전으로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지금의 휴전선 인근에서 진행된 진지를 두고 전투를 진행한 고지 전투로, 6·25 한국전쟁 당시의 절반에 가까운 인명 피해가 바로 고지 전투에서 발생하였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에서 북한 공산군 포로들이 식사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일자: 1950년 10월 19일
부산의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공산군 포로들이 식사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일자: 1950년 10월 19일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공산군과 휴전 회담의 지연


그러나 휴전회담은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 포로들이 본국으로의 송환을 거절하여, 포로 송환 문제로 2년 이상을 끌었다. 1952년 4월, 국제적십자연맹(IRC)의 조사에 따르면 132,000여 명의 공산군 포로 중 북한군 54,000여 명과 중공군 5,100여 명만이 본국 송환을 희망했다.

전쟁의 와중에도 사람 생명의 가치를 가장 우선시하는 유엔군 사령부는 본국으로의 송환을 원치 않는 반공 포로들이 강제 송환되고 나서 공산군에 의해 학대받을 것을 걱정하였고, 포로 송환은 포로들의 자유의사에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산군은 자국의 포로들이 출신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치욕적인 일로 대외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이 의심받게 되자, 제네바 협정 때문에 모든 포로가 강제로 일괄 송환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이로써, 6·25 한국전쟁의 휴전 협상은 공산군이 포로 송환 문제에 대해 자기들의 주장을 포기할 때까지 2년을 질질 끌었다.

결국은 공산군의 무모한 포로 강제 송환 시도로 2년을 끌어온 휴전 협상 기간에 지금의 휴전선 인근에서의 치열한 전투로 6·25 한국전쟁 사상자의 절반이 생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였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이 먹을 음식은 포로들 자신이 장만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100,000명의 포로가 먹을 김치를 포로들이 직접 담그고 있다. 일자: 1950년 12월 1일
미 육군 의무단 소속의 윌리엄 무어 대위가 부산의 공산군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병동 점검을 하고 있다. 이 병원에는 3,600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병실에서 하루 평균 3,00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일자: 1950년 12월 1일


포로수용소의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의 차이점


유엔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을 다룬 기록만으로도 우리는 왜 6·25 한국전쟁 당시, 자국 병사들의 큰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유엔군 사령부는 공산국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공산군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무모하게 2년 동안 휴전 협정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의 와중에도 사람의 생명을 가장 우선시하는 자유세계를 대표하는 유엔군 사령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유엔군 포로수용소와 공산군 포로수용소의 포로 대우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국제적십자연맹에서는 사전 통보 없이 유엔군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전쟁 포로들의 위생 상태, 건강 검진 수준, 음식물 공급 등 다양한 조사를 하고는 했었는데, 유엔군과 국군은 전쟁 포로를 최대한 인도적으로 대우하였다.

그러나 공산군 포로수용소에서의 국군과 유엔군 포로들은 굶주림, 수면 부족, 낮은 의료 수준, 심지어 고문으로 고통을 겪었다. 더군다나 포로수용소 경비병들이 포로들을 위해 국제적십자연맹이나 구호 단체 등에서 보내온 구호 물품과 음식물을 빼돌린 후 자신들이 사용하기까지 했고, 국군 포로들은 북한 공산군이 특히 가혹하게 다루었다는 사실을 증언을 통해 알 수가 있다.

미 극동군 의무감 에드카 흄 소장과 미 육군 의무감 레이몬드 블리스 소장, 3야전병원 사령관 존 크레슬러 중령, 14야전병원 사령관 프랭크 미네르바 중령이 부산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손을 든 중공군 포로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다. 일자: 1951년 4월 3일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이 제주도의 반공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자, 반공 포로들이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일자: 1952년 7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과 생명 구출


6·25 한국전쟁의 배후를 조종한 인물이고, 휴전 협상을 지연시킨 장본인인 소련의 스탈린(Joseph Stalin)이 1953년 3월 5일 죽자, 공산군은 1953년 4월 다시 휴전 협상에 몰입하였지만, 휴전협정이 조인되면 한반도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정에 반대하였다.

공산군은 인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 스위스로 구성되는 중립국송환위원회(Neutral Nations Repatriation Commission, NNRC)의 감독 아래 반공 포로들을 육 개월 간 중립지역에서 본국으로 송환하려는 회유와 설득을 하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공산군이 반공 포로들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본국으로 송환하려고 위협할 것을 걱정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사령부와 협의 없이 국군에게 반공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명령하였다. 1953년 6월 18일 국군은 부산, 마산, 논산, 광주 상무대, 대구, 영천, 부평 등지의 포로수용소에서 35,400여 명 중 25,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자유세계에 대한 신념과 북한 동포를 구출해야 한다는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단이었다.

반공 포로 석방.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25,000여 명의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였다. 사진은 반공 포로 석방을 환영하는 서울의 학생들의 모습이다. 일자: 1953년 6월 18일


지금도 변하지 않은 공산당의 만행


6·25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2020년에도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송환되고 학살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사람의 생명을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의 정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를 강제로 붙들어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행위를 보면서 공산당의 만행 또한 여전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이 유엔 인권이사회의 협의기구 위원으로 선임되는 현실은 무척이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한 번도 거론하지 않는 대한민국은 북한 주민을 구출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되돌아가면 분명히 학살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젓이 탈북자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의 행위이다.

70년 전 자유세계를 대표하는 유엔군이 공산군 포로를 자유세계로 구출하느라 스스로 큰 피해를 보면서도, 휴전 협상을 끌었던 6·25 한국전쟁의 역사를 볼 때,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과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는 지금의 우리 현실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갈등을 느끼게 된다.

<mv14000@gmail.com>


글 | 안재철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현재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6·25 한국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