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정치참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답변

청소년 정치참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답변

2020-03-19 0 By worldview

월드뷰 03 MARCH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3


글/ 김수인(영어교사)


최근 국회에서 만 19세이던 선거연령을 18세로 낮추는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올해부터는 고등학교 3학년 일부가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선거법 개정에서 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함께 선거연령을 내린 것은 참정권 확대에 기여했다는 일선의 평가도 있다. 하지만 선거연령 하향에 대한 우려의 여론도 많다. 무엇보다 아직은 정책에 대한 이해와 세계관이 뚜렷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정치적 선택과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로써 아직 학업과 진로에 전념해야 할 일부 고3인 학생들과 일선 학교는 정치적 시비의 장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역과 정치 노선에 따라 청소년들의 정치참여에 대한 찬반도 갈렸다.

청소년들의 정치참여가 기성세대들에게는 특정 정치 여론에 유리할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보수 쪽에서는 청소년 정치참여를 우려하는 반면, 진보 쪽에서는 반색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기대 심리일 뿐인지 아니면 실제로도 그러한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일일 테지만, 아직 정치적 판단력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단순히 어리다는 이유로 청소년들이 특정 정치 성향으로 치부되는 편견도 위험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BC 384-322).

사실 청소년들의 정치교육과 정치참여에 대한 논의는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독배를 마셨다. 그만큼 젊은이들의 의식이 각성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청소년들의 정치교육에 대한 논의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좀 더 본질적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의 목적이 ‘인간적인 좋음’을 탐구하는 데 있는데, 청소년들이 ‘인간적인 좋음’을 온전하게 판단할 수 있는 좋은 인간의 덕은 용기, 절제, 자유인다움, 통이 큼, 정의, 친애 등의 품성적인 덕, 지성적인 덕, 실천적인 덕을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좋은 인간’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교육’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현행의 교육과정과 철학에서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교육을 충분히 행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교육체제 속에서 청소년들을 ‘좋은 시민’으로 양성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들이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좋은 시민’이 되는 기본덕목이기에 지나치게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 입장이라 볼 수 있다.

일찍이 교육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한 플라톤의 <국가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살펴보면 그들의 고찰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시민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교육의 목표는 좋은 인간과 좋은 시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학과 입법, 교육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각각의 시민은 그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모든 시민이 국가의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국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이 국가에 의해서 공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의 중요성을 주목하지만, 결코 오늘날의 의미에서 국가주의적 혹은 전체주의적 관점의 교육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육을 통해서 개별적인 시민의 본성과 특징을 인정하고 본성의 장점과 특징을 극대화해야 함을 주장하는 개인주의적인 입장이 강하다. 그러나 그러한 개별적 특성이 결국 사회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플라톤의 교육에 대한 철학은 맥락이 비슷하다.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의 목적은 첫째, 행복한 시민을 만드는 것, 즉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태도와 행동 성향을 발달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인격을 갖춘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과정은 행복의 증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교육은 행복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태도와 성향을 기르는 동시에 지적 안목을 갖도록 ‘영혼의 눈’을 돌리는 과정이다. 둘째, 모든 어린이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회의 규범을 익혀야 한다. 셋째, 어린이들이 이후에 받는 교육은 적성과 사회의 필요, 그리고 사회의 요구를 고려하여 결정된다. 이런 규범과 사회의 필요와 요구는 플라톤의 공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플라톤이 구상한 교육의 단계에서 제1단계는 태도의 형성에, 제2단계는 특정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 적성을 계발하는 데, 제3단계는 도덕적 원리를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교육의 과정은 평등한 행복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런 교육적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 아직 미숙한 청소년들의 섣부른 정치참여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좋은 지배자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좋은 피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좋은 시민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좋은 지배자의 덕목을 이룬다. 좋은 인간이 아닌 시민을 그냥 그런 시민으로 교육하는 것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벗어나서 이루어질 수 없다.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은 신적 혹은 영웅적 존재를 만들어내기 위함이 아닌 모든 인간을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고 그런 개개인들이 이루어가는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한 것이다. 좋은 시민은 공동의 규범을 준수할 수 있어야 하며 또 더 나아가 규범을 형성하는 주체자로서도 참여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무엇보다 법률은 ‘정치학’의 성과물이며 법률의 목적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규정하여 각 개인이 더 나은 시민으로 성장하는 데에 있다. 교육은 결국 법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공동체의 보살핌은 법을 통해 이루어지고 훌륭한 보살핌은 훌륭한 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교육의 내용은 법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입법가는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좋은 시민은 사회를 통치하는 근간이 되는 입법의 중요성과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정치학은 윤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은 윤리학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좋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윤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이 결코 별개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리학이란 기준은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고민하는 가치 중심적 학문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치적 선택이 윤리와 도덕과 일치할 때에 최고의 정치를 이루어낼 수 있다. 정치의 영역에서 윤리의 기준이 반영될 수밖에 없고 크리스천의 정치적 선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의 기준을 반영하게 된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의 도덕관, 윤리의식이 성숙되어야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기독인들의 다음 세대 정치교육의 방향은?


기독교 신앙은 어떤 다른 종교들처럼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사상과 관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신학적 교리를 바탕으로 기존의 도덕과 윤리의식을 변화시킨다. 또한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각 개인의 삶에 투영되어 나타나고 개개인의 행동과 선택을 새롭게 하여 한 시대의 문화와 법률까지도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인들은 이러한 청소년 세대의 정치참여를 어떻게 바라보고 준비해야 할까? 우선 우리는 좋은 시민이기 이전에 좋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성경이 말하는 선과 악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전하고 세상을 다스리고 경영하는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전수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 의하면 올바른 정치란 시대와 관계없이 불변하는 절대적인 도덕과 윤리와 일치하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플라톤이 강조했던 음악과 체육, 글쓰기, 놀이와 같은 순수한 전인교육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 가장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거연령의 하향을 두고 아직 미숙한 청소년들을 특정세력의 정치화의 대상으로 삼는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주입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또한 청소년들에게도 이것을 균형 있는 성경적 가르침을 통해 선과 악에 대해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길러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kim2shine@gmail.com>


글 | 김수인

현직 영어교사로,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글로벌 교육협력 석사과정에서 시민교육을 전공하고 있다. 9차 개정 교육과정 영어 능률교과서 집필 위원과 바른 교육 학부모연합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데릭 프린스의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