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의 역사를 왜곡하여 좌경화를 부추겨 온 우리

6·25 한국전쟁의 역사를 왜곡하여 좌경화를 부추겨 온 우리

2020-03-17 0 By worldview

월드뷰 03 MARCH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1


글/ 안재철(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


1. 흥남철수작전의 역사적 왜곡과 우리 사회의 좌경화 병폐의 원인


필자는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 피란민 14,000명을 구출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 수사의 장례미사에 참석한 2001년 10월 14일 이후, 국가 안보 교육에 모든 것을 걸고 지난 20년 가까이 5,200여 회의 <6·25 전쟁 사진전>과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원한 세계 67개국 국기 퍼레이드>라는 아스팔트 활동과 6·25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연구 조사 발굴해온 사람으로서, 6·25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우리 사회의 커다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6·25 한국전쟁 당시, 마치 우리가 대한민국을 모두 지킨 것인 양 오도하고, 자신들을 희생하면서까지 대한민국을 지킨 미군들의 공로를 빼앗아 온, 소(小)영웅심에 가득 찬 사람들의 행동이 아무런 문제없이 받아들여져서, 오늘날 미국을 조롱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무참히 짓밟는 자들이 심지어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수여하게 되는 문제점을 낳는 데 일조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주장을 해온 필자는 흥남철수작전을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홍보하여 오면서, 한국 사회에서는 왕따를 당하기도 하였다. 필자가 미군을 칭찬하느라 한국인들의 공로를 짓밟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남의 희생의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훔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영화 <국제시장>에 나왔던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란민 철수작전에서 피란민을 구출하지 않으려는 미군 지휘관을 한국인 통역관이 설득해서 미군들이 무기를 버리고 피란민을 구출한 것인 양 영화를 만들었던 것은 가장 비겁한 영화상의 역사에 대한 조작이었다. 필자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있다. 영화는 허구이기 때문에 흥행을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런 소리는 언제나 대한민국을 좌경화시키는 데 앞서온 자들이 거짓으로 국민을 선동하여 놓고, 늘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지난 40여 년간 그들이 벌여온 예술을 통한 국민 선동이 예술이니까 괜찮다는 변명을 대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심지어 역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는 청소년 세대는 이것을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6·25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이제는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중요한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필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피란민 철수 결정을 누가 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란민 구출 작전의 진정한 영웅이 누구였는지에 관해서, 우리가 소홀히 다루며 무시하고 있는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시 민간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결정권자가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들이 북한 민간인들을 구출하고자 현장에서 실제로 고생을 하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출하였느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조사되고 연구된 적이 없었고, 심지어 미군들의 헌신적인 피란민 구출 작전을 매도하고, 미군들은 마지못해 피란민을 구출한 양 부끄럼 없이 이야기하는 우리의 잘못된 역사관과 현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중공군은 1950년 11월 25일 북서부 전선에서 대대적인 중공군 2차 공세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북동부 전선에서는 야간에만 이동하는 데다 산악지대인 장진호 주변에 매복하는 배치가 예상보다 늦어져, 중공군의 북동부 전선의 미 10군단에 대한 공격은 북서부 전선의 미 8군에 대한 공격보다 이틀이 미뤄진, 1950년 11월 27일에 공세를 시작한다. 한반도 북동부 전선에서, 중공군은 12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제9병단으로, 야간이동을 통하여 함경남도의 산악지대에 비밀리에 스며들었다. 중공군은 중공군 9병단 소속의 12개 사단 병력 중 20군(58사단, 59사단, 60사단, 89사단), 26군(76사단, 77사단), 27군(79사단, 80사단, 81사단, 90사단)의 10개 사단 병력을 초기 전투에 직접 투입하였다. 한반도 북동부의 함경남도에는 유엔군 소속의 미 10군단 예하의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미 육군 3사단이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또한, 국군 1군단 예하의 국군 수도사단과 국군 3사단은 함경북도에서 작전 중이었다.
1950년 12월 10일 철수하는 미 해병 1사단과 장진호 전투에서 생존한 병사들로 구성된 미 육군 7사단 31연대 전투단 생존병력으로 구성된 임시대대(국군 카투사, 국군으로 활약한 대한민국 경찰, 영국군 특공대 포함) 대열과 뒤섞여 움직이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중공군을 피해 자유와 생명의 세계인 대한민국으로 가고자 따라나선 것이다. 이들 북한 주민들에 숨어서 유엔군에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는 중공군 때문에, 철수하는 미군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군 지휘관들은 북한 주민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움직이도록 피란을 허용하였다. 일자: 1950년 12월 10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이끄는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38선을 넘어 북진, 북한 공산군을 압록강까지 몰아내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의 통일을 눈앞에 두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300,000명에 가까운 중공군의 출현으로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한반도 동북부 전선에서도 11월 27일 함경남도 북단 개마고원 지역의 장진호 인근에 갑작스럽게 출몰한 중공군의 공격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철수를 시작하였다. 사진은 12월 8일 철수하는 미 10군단 산하, 미 해병 1사단이 머물렀던 장진호 남단 고토리(古土里) 임시 캠프 주변에 개마고원 일대의 수천 명의 북한 주민들이 몰려있는 항공 촬영 사진이다. 그 지역의 거의 모든 주민이 자신들의 가장 큰 재산인 소를 몰고, 가지고 갈 수 있는 가재도구들은 무엇이든지 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유세계로 가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무작정 유엔군을 따라나섰다. 이 한 장의 사진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의 통치 아래서 5년을 살았던 북한 주민들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기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여주고, 동시에 흥남철수작전은 유엔군이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진정으로 북한 주민들을 자발적으로 구출했음을 보여주는 흥남생명구출작전의 증거가 된다. 일자: 1950년 12월 8일.


2. 흥남철수작전과 미국이 진행한 <생명의 항해>의 메시지


우리는 6·25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인도주의적인 생명 구출 작전 이야기를 통해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생명 구출을 향한 위대한 도전을 발견할 수 있다. 6·25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1950년 11월 말, 한반도 북동부 장진호에 갑자기 출현한 중공군의 공격으로 유엔군 사령부는 12월 유엔군과 국군의 흥남 철수를 결정하였다.

군사적 전략상의 의미에서 흥남철수작전의 가장 중요한 현안은 효율적인 군대의 철수를 진행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성공하였다. 하지만 흥남철수작전이 전쟁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군대의 성공적인 철수 작전 진행뿐만 아니라, 어떤 전쟁사에도 없었던 전쟁과 무관한 100,000명에 가까운 민간인 구출 작전이 함께 수행되었다는 데 있다. 더군다나 북한 공산정권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던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 민간인은 비록 남한의 국민과 같은 민족이었지만, 전쟁 당시에는 적국의 국민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구출 작전은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극한 상황에서도 이러한 인도주의적이고 인간의 생명 구출을 우선으로 하는 군사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무한한 자부심을 주는 위대한 일이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5월 28일 ~ 6월 4일 8일간 독일군에게 포위되었던 영국, 프랑스, 벨기에 연합군 338,000여 명의 철수 작전이었던 된케르크(Dunkerque) 철수에 비유하여 흥남철수작전 성공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을 자주 듣고는 한다. 그러나 병사들뿐만 아니라 철수하는 병력 100,000여 명과 거의 같은 수의 피란민을 모두 무사하게 철수시켰다는 점에서는 흥남철수작전은 된케르크 철수와는 비교조차 할 필요가 없는 경이로운 철수 작전이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당시, 북한을 탈출하려는 주민들을 구출하려고 미군 지휘관과 병사들은 모두 나서서 피란민들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피란민을 구출하고자 흥남 철수 후에 자신들의 새로운 군사작전에 곧바로 필요한 그 많은 군수물자를 포기하고 대신 전혀 알지 못하던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의지로 가득 찬 사람들의 생명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극한 전시 상황에서도 미군이 발휘한 놀라운 인도주의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필자는 흥남철수작전을 ‘흥남 생명 구출 작전’이라고 부른다. 6·25 한국전쟁 당시의 생명 구출 작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민주주의 세계의 위대한 도전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흥남철수작전 명령서 극동군 사령관 작전계획 205호, 1950년 12월 8일.
1950년 12월 11일 흥남항 인근의 연포비행장을 방문하여 흥남철수작전 전반에 관한 작전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회의에서 맥아더 사령관은 10군단장 에드워드 앨몬드 소장의 흥남철수작전의 세부 계획을 승인한다. 일자: 1950년 12월 11일.


3. 피란민 철수 결정은 누가 했는가?: 맥아더 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군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출하였음에도, 심지어 미군들의 헌신적인 피란민 구출 작전을 매도하고, 미군들이 마지못해 피란민을 구출한 양 버젓이 이야기하는 우리의 잘못된 역사관과 현실을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소(小)영웅적인 관행을 버리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은 절대 일등 국가로 올라서지 못하리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감사한 것을 감사하다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용감한 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는 당시의 작전 상황에 관하여 날카롭고도 엄밀하게 조사했다고 평가를 받는 연구 자료와 미 국방성에서 비밀 해제된 1950년 흥남 철수 당시의 미 10군단 사령부 지휘보고서, 유엔군 사령부와 미 10군단 사령부 간의 무선통신 전문 등의 분석을 통해 피란민 철수 결정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을 밝히고, 피란민 구출의 진정한 영웅이 누구였는지 밝히고자 한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당시 민간인 철수 결정과 인도주의적 지원과 구출 과정에 대해 필자가 조사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1. 리차드 스튜워트(1991), 「참모들의 작전 수행: 한국주둔 10군단, 1950년 12월」
2. 앨몬드 사령관, 거스리 참모장, 「10군단 사령부 지휘 보고서, 1950년」
3. 극동군 사령관 작전계획 205호, 1950년 12월 8일, 극동군 사령부
4. 10군단 작전지침 27호, 1950년 12월 9일, 10군단 사령관
5. 유엔군 사령부 발신메시지(무선통신), 1950년 12월 9일
6. 극동군 사령부 수신메시지(무선통신), 1950년 12월 13일
7. 극동군 사령부 수신메시지(무선통신), 1950년 12월 14일
8. 극동군 사령부 수신메시지(무선통신), 1950년 12월 14일
9. 극동군 사령부 수신메시지(무선통신), 1950년 12월 22일

1950년 12월 공산 통치에서 달아나 자유세계로 가기 위해 흥남항에 몰려있던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든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중공군의 침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이미 흥남항보다 남쪽인 원산까지 철수한 이때는 동해만이 이들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달아나 자유세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사진은 12월 19일 흥남항의 북한 피란민들이 그린비치에서 미 상륙정(LST)에 타고 있는 모습이다. 흥남생명구출작전이라고 불러야 하는 흥남철수작전은 10만 명에 가까운 북한 주민들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으로 탈출시킨 인류역사상 가장 빛나는 인도주의적인 생명구출작전이었다. 일자: 1950년 12월 19일.
1950년 12월 한반도 동북부 지역의 북한 주민들이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서 자유세계로 가는 길은 이제는 동해 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유엔군이 자신들만 철수하지 않고 반드시 북한 피란민들도 구출해 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흥남항에 몰려들었다. 사진은 흥남 철수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당시 흥남항에 몰려 철수를 기다리는 북한 주민들과 주민들을 통제하는 미 육군 3사단 병사들의 모습이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마지막으로 흥남항을 방어하고 피란민 철수 작전을 책임지고 있었던, 미 육군 3사단 병사들은 당시에는 적국의 국민이었던 북한 피란민이 철수하는 배에 타는 동안 후방을 방어하다 흥남항을 공격하는 공산군과의 교전에서 자신들의 고귀한 목숨마저 잃기도 했다. 일자: 1950년 12월 22일.
1950년 12월 24일 흥남항 폭파. 유엔 해군사령부의 미 해군 90상륙지원단과 미 해군 77기동항모단이 철저한 준비로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시켰다. 미 해군 90상륙지원단 폭파팀 비고르호가 흥남항에 남긴 모든 군수물자와 항구 설비를 폭파하였다. 미군은 앞으로의 전투에 필요한 폭약과 군수물자 대신 피란민을 구출하는 인도주의적인 생명구출작전을 전개하였다. 피란민을 구출하는 대신 부두에 남긴 폭약과 군수물자를 이렇게 폭파해서 중공군이 남긴 물자나 항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일자: 1950년 12월 24일.


4. 피란민 철수 결정과 구출 과정: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


4.1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12월 8일 흥남 철수 작전계획 205호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복당할 가능성이 있는 정치적 인사들을 흥남 지역에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정치적 인사들은 고위직의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주민을 의미한 것이다.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하였을 당시에, 지난 5년간 북한 공산정권의 악행에 지쳐있던 함경남북도 일대의 모든 지역의 대부분 주민이 유엔군과 국군을 환영하고, 이제 자유세계로 통일될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에 다시 공산당의 통치 아래 들어가면 대부분의 주민이 그들에게 학살당할 것이 분명하였고, 당시의 상황을 보면, 함경남북도 일대의 대부분 주민이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당시 공산 치하로부터 탈출하려는 피란민들은 유엔군이 본격적으로 흥남항에 도착하기 전부터도 흥남항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미 장진호에서 유엔군이 철수할 때부터 그 지역에 살던 북한 주민들은 자유를 찾아 고향을 버리고 미 해병 1사단을 따라 굽이굽이 산길을 걸어서 따라오던 사람들이 많았다.

피란민들은 그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 유엔군의 뒤를 쫓아오던 공산군에게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힘든 피란길을 나선 것은 지난 5년간 공산주의 치하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 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고, 기독교가 강했던 북한 주민들은 공산 치하에 있다가는 더 이상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세계에 대한 갈구로 가득 찬 사람들도 많았다.

4.2

12월 9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발신 전신 메시지 CX-50838에서는 민간인 조력자들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보복을 당할 염려가 있는 한국인 정치인들을 가능한 한 많이 철수시켜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 것을 볼 수 있다.

4.3

12월 13일 유엔군 사령부로 보낸 미 10군단장의 전신 메시지 X-15097을 보면 미 10군단 지휘부에서는 피란민들이 대한민국으로 올 수 있는 운송수단을 유엔군에게 요청하는 것을 포함하여, 애국인사들을 철수시켜 달라는 요청은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에서 제안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렇듯 피란민 구출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미 10군단 지휘부에서는 이미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여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4

1950년 12월 14일 미 10군단 사령관의 전신 메시지 X-15132에서는 흥남항에 몰려있는 피란민들을 관리 보호하고 있는 미 육군 3사단장이 보고한 내용을 정리하였다.

『세 명의 함흥시 대표가 12월 12일 미 육군 3사단을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간청합니다.

“미군과 국군이 함흥 및 흥남에서 철군하는 것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으며, 공산 치하에서 6년 동안이나 압제를 받아온 이들 주민은 유엔군을 따라 떠나고 싶어 합니다.”

“피란을 떠나지 못하면 공산군들이 여자나 아이들을 포함해 그들 모두를 죽일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흥남으로 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모두가 죽임을 당하기 전에 유엔군을 따라 피란 갈 수 있는 해상 운송편이 제공되기를 원하거나, 유엔군이 함흥에 남아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해줄 것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추산하기에 선편으로 남한으로 피란 가야 할 사람들이 30,000명 정도였습니다.”

“‘유엔군이 북한 주민들을 구출해주거나, 자기들을 떠나지 말고 지켜 달라.’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이 ‘애국자들의 생명을 구하고 피란민들을 수송해줄 것을 유엔군을 방문해서 부탁을 해보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전신 메시지는 이승만 대통령이 피란민을 구출해달라고 공식적으로 미 10군단에 요청하였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려주는 내용이다.

4.5

1950년 12월 22일, 유엔군 사령부로 보낸 미 육군 10군단장의 전신 메시지 X-15345에서는 피란민 구출과 관련하여 인도주의적인 조처를 하였음을 보고한다. “10군단의 최근의 민정 활동과 관할 구역을 고려한 결과 많은 민간인이 유엔군 사령관의 명령에 의한 구출대상에 해당하고,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인도주의적인 이유로 해서 수많은 사람을 대한민국으로 철수시켰고 더 많은 사람을 철수시킬 계획입니다.”라는 내용이다.

4.6

1950년 12월 10군단 사령부 지휘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부분을 다루었다.

“가능한 한 많이 피란시키려는 미 10군단 사령관의 방침에 따라, 미 해군과 대한민국 해군은 이용 가능한 화물선을 최대한으로 확보하려고 힘을 합쳐 노력하였습니다.”

“완벽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보병 3사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전력을 다하여 처리하였습니다.”

“소대장에서 사단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의 전투 부대 지휘관들이 피란민 문제에 관여하고 있었으니, 피란민들을 보호하고, 식량을 공급하면서, 그들을 대기 장소로 이주시키는 한편 끝으로 그들의 구조 계획까지도 수립하여야 했습니다.”

“흥남 피란민 문제에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군대가 주동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때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전투 부대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투 부대들은 자신들의 관할 구역 내에 있는 피란민들을 처리하면서 부대의 이동과 안전에 대한 위협에도 빈틈없이 대처하여야 했습니다.”

“결국은 피란민들과 함께 고립되었던 보병 3사단장과 같은 전투 부대 사령관은 피란민들이 문제가 될 게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피란민들이 그 지역의 부대들에 숙제를 안겨주고 있었으니, 숙제는 전투 부대들이 피란민들을 이주시키고, 조사하고, 먹이면서 피란까지도 시켜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부닥친 참모들의 숙제는 바로 전술상의 숙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이 흥남철수작전을 성공리에 지휘한 미 해군 제독 터너 조이 중장에게 부산에서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일자: 1951년 1월 23일.


5. 자유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 인도주의적인 사랑과 희생


필자가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군들이 처음에는 피란민을 구출하고자 하는 의사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심지어 대한민국 국방부 예하의 연구소의 자료나 민간단체들 그리고 많은 언론의 보도를 보면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에 관해서 궁금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조사를 했던 것이다. 모두가 역사적 사실에 관한 자료 조사도 없이, 그냥 책상에 앉아서 누군가 먼저 한 이야기를 따라서 하는 소위 “소설을 쓰세요! 소설을!”하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하지만 앞에서 조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 미군은 처음부터 가능한 한 최대한의 피란민 수송 방법을 찾고자 모든 방법을 마련하고 있었다. 역사적 사실을 조명하고 분석할 때는 객관적인 자료와 분명한 근거에 의해서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이다. 특히, 위기에 처한 극한 상황에서 지휘관들이나 조직의 리더가 어떻게 처신을 했는지, 그리고 어떠한 의사결정을 하였고, 어떻게 실천에 옮겼는지를 조사하여 다음 세대들을 위한 교육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제로 미군들이 처음에는 피란민 문제를 귀찮아하다가 마지못해 그들을 철수하기로 했는지 관심을 두고 조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피란민을 구출하기 위해, 미군 일개 군단이 일 년 동안 사용할 모든 물자를 흥남부두에서 파괴하는 결정을 과연 군단장이 현장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순이 아니던가? 만약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을 비롯한 미군 지휘부가 몇몇 사람의 설득에 의해 막판에 마지못해 북한 피란민들의 흥남 철수를 결정했다면, 대부분의 자국민이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전쟁에 참전하여 수없이 많은 자국 젊은이들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지켰다는 그들의 주장이 모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은 바로 인간 생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타인의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인도주의적인 사랑과 희생이 항상 그 기저에 깔린 데서 나온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고민에 빠져있던 필자가 북한 민간인 철수에 관해 유엔군 사령부와 미군 사령부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얼마나 고심을 하였는지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사료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사수하고 동시에 공산 치하에 살고 있는 북한 주민을 구출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는지에 대한 사실까지도 알게 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진정한 애국심과 우리 국민에 대한 사랑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6·25 한국전쟁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당시에,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잊지 않으려 했던 당시 그들 지휘관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의 갈등과 고뇌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출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니, 비록 북한 주민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그들 자신과 미국의 젊은이들의 많은 희생이 있었더라도 그들은 창조주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mv14000@gmail.com>


글 | 안재철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현재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6·25 한국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