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엄성의 성경적 근거
2019-12-11인간 존엄성의 성경적 근거
월드뷰 12 DECEMBER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8 |
글/ 김철홍(장로회신학대 신약학 교수)
우리는 ‘인간은 존엄하다.’라고 말한다. 왜 인간은 존엄한 것일까? 그 근거는 무엇일까? 세속 철학자나 윤리학자도 같은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답한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대답이 되지는 못한다. 기독교인은 세속 철학이나 윤리학에 근거하여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엄하다.’고 선언할 때 우리 주장의 근거는 성경이다. 인간 존엄성의 성경적 근거는 한마디로 말해 ‘인간에게는 신성(divinity)이 있으므로 존엄성(sovereignty)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어떤 구절이 인간의 신성과 존엄성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다
흔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세기 1:27).”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존엄하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신성(神性), 즉 신적 속성(the Attributes of God)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아담의 범죄 때문에 신적 속성이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신적 속성이 남아 있고, 궁극적으로 그 신적 속성이 회복된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게 하나님의 신성(divinity)이 다시 충만하게 되는 것이 구원이다.
“…너희가 …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후서 1:4).”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sharers of the divine nature)가 되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로새서 2:9-10).”는 그리스도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오셨지만, 그것 때문에 그의 ‘신성’에 손상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하나님의 신성은 충만하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완전한 100%의 ‘신성’을 갖고 계신다. 종말의 때에 그 신성으로 ‘우리도’ 충만하게 되고, 아담이 갖고 있었던 온전한 하나님의 신성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은 인간이 원래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divinity)과 인성(humanity)이 공존한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처럼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동시에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인간성이 완성되고,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되시면서, 동시에 구원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보여주신다.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이 완전히 꽃피게 되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는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하나님처럼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없어지고 신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
동방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와 같은 정교회(Orthodox Church)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헬라어로 이것을 Theosis라고 하고, 영어로는 Divinization, 혹은 Deification이라고 한다. 그 뜻은 모두 다 ‘하나님처럼 됨’이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처럼’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나?’하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안에는 정교회가 가르치는 내용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편 8:5).”에서 ‘그’는 아담이다. ‘영화’는 히브리어로 ‘카봇’(kabot)인데, ‘영광’(glory)이란 뜻이다. ‘존귀’는 ‘하다르’(hadar)고, ‘보석처럼 찬란한 아름다움’(splendor)이란 뜻이다. ‘관으로 씌우셨다’로 번역된 단어는 ‘아타르’(atar)라는 동사인데, ‘에워싸다, 둘러싸다’라는 뜻이다. ‘머리에 둘러싸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관을 씌우다’가 되며, 현재 개역 성경은 그렇게 번역했다. 하지만 머리가 아니라, ‘몸을 둘러싸다’로 해석해도 된다. 어차피 히브리어 본문에 ‘왕관’이란 단어는 없으므로, ‘몸을 둘러싸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고대 유대교 전통도 ‘몸을 둘러싸다’로 해석한다.
하나님은 아담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보석처럼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둘러싸셨다. 영광의 빛의 옷을 입혀주셨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사라졌고, 벗은 몸으로 발견되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린도후서 5:1).”에서 바울이 의미한 바는 ‘빛의 옷’을 잃어버린 아담에게 ‘가죽 옷(창 3:21)’을 입혀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죽 옷(고대시대에는 텐트/장막을 가죽으로 만들었다)을 벗을 때에(죽을 때에) ‘영원한 집’ 즉 영광의 빛으로 빛나는 ‘부활의 몸(고전 15:43)’을 입게 해주신다는 말이다.
부활 때에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것(“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은 곧 우리가 빛나는 ‘영광의 몸’을 회복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담긴 하나님의 신성(divinity)이 아담의 수준을 넘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곧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인간은 존엄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무가치해 보이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 있고, 미래에 그 신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충만하게 되어 인간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악한 인간도, 살인마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 때에 일어난 일과, 미래의 종말에 일어날 구원을 동시에 바라본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으므로 존엄하다.
2. 하나님은 인간의 형상을 갖고 계신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많지 않다. 약간 놀랍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에스겔서 1장은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갖고 계신다고 말한다. 어느 날 에스겔은 하나님의 보좌가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하나님의 보좌는 고정식이 아니고, 바퀴가 달린 이동식 보좌다). 하나님은 ‘그룹’ 혹은 ‘거룹’이라고 불리는 보좌를 타고 다니신다(“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시편 18:10).”). 에스겔 1:26은 이렇게 말한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image, shape)이 있어 사람(Adam)의 모양(appearance) 같더라.”
보좌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고, 보좌의 모습을 보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에스겔이 본 환상이 마치 실루엣을 통해 보는 것 같이 약간 희미하게 보이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좌를 보고도 그것이 보좌 ‘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라고 말한다. ‘형상’은 히브리어로 ‘뜨뭇’(demuth)이고, ‘모양, 형상’(shape, image)이란 뜻이다. 에스겔은 어떤 형상을 보았을까? 그는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을 보았다고 말한다. ‘모양’은 ‘마르에’(mareh)라는 단어고, 그 뜻은 ‘생김새’(appearance)다. ‘어떤 형상이 있는데 그 생김새가 사람처럼 보였다’라는 말이다. 보좌 위에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으므로,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묘사다. 그 사람의 형상을 한 하나님은 “그 허리 위의 모양”도 “불같고”,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같다(겔 1:27)”고 말한다. 그 형상은 “불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겔 1:27)”,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겔 1:28)”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 생김새가 사람처럼 보이는데, 온몸이 불처럼 보인다. 사방으로 광채가 나고, 무지개와 같이 찬란한 빛이다. 에스겔은 자신이 본 것을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고 말한다. ‘형상’과 ‘모양’이라는 동의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인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이 아니시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본문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말과, 2) ‘하나님은 사람의 형상을 갖고 계신다’라는 말을 동시에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말은 단순히 인간에게는 ‘신성’이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공통분모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과 하나님은 분리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서로 깊이 상호 침투되어 있는 존재다. 마치 우리가 두 손을 마주하여 깍지를 끼면 양손의 손가락이 서로 얽히게 되는 것처럼 인간과 하나님은 그렇게 서로 상호 침투하고 있다. 인간과 하나님은 공통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도가 궁극적으로 사랑, 자비, 정의, 거룩, 신실함, 오래 참음, 선함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the Attributes of God)을 닮아가게 되는 것은 이런 연유다.
인간은 원래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매우 근접한 거리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지만, 사람의 형상을 갖고 계시고,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다. 창조 직후 아담은 빛나는 몸을 갖고 있었다는 점과 에스겔이 본 하나님의 모습이 빛과 영광 그 자체였다는 점은 인간과 하나님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인간 존엄성의 두 번째 이유가 여기 있다. 인간과 하나님은 서로의 형상을 공유하고 있다. 인간과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서로 겹친다. 이 점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앞으로 하나님의 보좌에도 함께 앉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마 19:28; 고전 4:8, 6:2; 엡 2:6; 딤후 2:12; 벧전 2:5, 9; 계 1:65, 5:10, 20:4-6, 22:5). 하나님은 인간의 형상을 갖고 계시므로 인간은 존엄하다.
3. 인간은 신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존엄성을 갖고 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신성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에서 말하듯이 인간의 내부에 있는 ‘내 안에 거하는 죄’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인간에 대해 비관적(pessimistic) 견해를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 있다는 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 인간이 신성(divinity)을 갖고 있기 때문에 존엄성(sovereignty)을 갖게 된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세기 9:6).”는 말씀은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에서 인권(人權)이 유래한다. 모든 인간에게 ‘하늘이 주신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는 이유는 바로 인간에게 있는 신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인권을 성경과 복음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뿐만 아니라 사실 세속 사회에서 말하는 인권도 따지고 들어가면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하는 것임을 바로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신성과 존엄성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북한 주민들에게 이 인간의 존엄성에 관해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현재의 국제 정세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을 더욱 고립시키고, 핵무기와 대량 살상 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김정은 정권은 결국 무너지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북한이 무너지고 나면 북한 주민들에게 대규모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긴다. 그때 우리는 단순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한 주민들의 잘못된 유물론적 세계관을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바꾸어주는 것이다. 그 책임이 남한의 교회에 있다. 우리는 북한 주민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한 존재로 창조하였는지,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우리는 먼저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인류 보편의 가치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르치되, 성경 말씀을 이야기하면서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북한 주민들이 갖고 있는 반 기독교적(anti-Christian) 성향을 중립화시킬 수 있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다.
금년 4월 헌법재판소는 7 대 2로 낙태 처벌 조항을 헌법에 불일치한다고 결정했다. 7명의 재판관들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고 판단하여 “임신 14주 무렵, 즉 임신 98일까지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라고 판결문에 썼다. 98일까지는 낙태를 해도 된다는 말은 98일까지는 그 태아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말인가? 99일이 되면 갑자기 없던 생명이 생긴다는 뜻인가? 생리학자와 의학자들은 생명이 수태에서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98일 이전의 태아도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신성이 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 즉 선택의 자유가 생명보다 더 귀중한 가치를 갖고 있나? 자유가 생명보다 더 상위의 가치인가?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자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우리의 자유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지켜야 하지만,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신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엄마 배 속에 있건, 밖에 있건 동일하게 존엄하다. 지난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 불일치 판결을 발표했을 때 주요 교단 총회와 기독교 단체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작은 일에도 나대던 기독교윤리실천협회도 반박하지 않았다. 왜 그들은 침묵했을까?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 스스로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이 인간 창조에 나타났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중국 정부는 신장 위구르 지역에 강제 수용소를 짓고, 100만 명 이상의 위구르족을 가두어 놓고, 소위 말하는 사회주의적 인간 개조를 하고 있다. 전체 1100만 명의 약 10%가 집단 수용소에 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하나같이 무신론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을 처형하고 장기 매매까지 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아예 나라 자체가 집단 수용소다. 과거 학생 운동권에서는 사회주의적 인간 개조를 당연한 것으로 이야기했다. 혁명에 성공하면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다 바꾸어놓겠다는 것이다. 그들 중 인간의 생각을 강제로 바꾸어놓겠다는 사회주의적 인간 개조라는 말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말인지 깨닫고 돌아선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사회주의적 인간 개조는 인간에 대한 테러이며 범죄다. 기독교는 인간의 존엄성과 무한한 가치를 지지하는 그런 정치 이념을 지지할 수밖에 없고,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결국 자유보다 생명을 상위의 가치로 여기는 보수주의 정치 이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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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철홍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과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에서 S.T.M. in Ecumenics을, 미국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