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민주 공화국에서 국민으로 사는 기독교인의 정치의식
2019-11-12자유 민주 공화국에서 국민으로 사는 기독교인의 정치의식
– 미국의 청교도와 공화주의는 혼란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가?
월드뷰 11 NOVEMBER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4 |
글/ 이정훈(울산대 법학과 교수)
I. 들어가며
광화문과 서초동에 사람들이 모여 구호를 외친다. 모두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광장에 나왔다고 주장한다. 어떤 목사들은 ‘조국’이라는 자연인을 구하기 위해 모여 “검찰 개혁”을 주장하는 서초동에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외치고, 또 어떤 분들은 광화문에 나오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워진다고 서슴없이 발언한다. 분열과 혼란의 시대다.
필자는 기독교인은 자신의 정치의식이나 정치적 입장을 교회에서 밝히면 안 된다고 하는 역사적 · 이론적 근거가 없는 “정교분리”에 관한 주장을 논파하기 위해 많은 강연을 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라는 테제가 현실 정치를 장악해서 기독교인들의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악법들이 국회에 계류되어, 기독교인들이 직접 반대 운동에 참여해야만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지방에서는 소수자 인권 보장이라는 미명 하에 공교육을 파괴하고 자유를 위협하는 동시에 주민들을 분열시키는 위험한 조례들이 발의되어 이에 반대하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결집과 정치 참여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진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위기와 혼란의 시대에는 역설적으로 부족했던 정치의식을 선진화하고 자유 민주 공화국의 시민들이 정치 참여의 경험을 통해 집단 지성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나 반면에 기독교인들의 자발적 참여와 순수한 동기가 특정 집단의 정치적 유익을 위해 이용되거나 이 과정에서 더 비천한 정치 상태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후자의 위험이 현실적으로 더 크게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독립을 쟁취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미국 정치사에서, 청교도적 정치의식의 기초가 된 칼빈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공고해진 공화주의의 전통에 주목하고 이를 공부하는 것은 어쩌면 혼란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기독교인에게 필수 불가결한 과정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II. 칼빈주의와 공화주의의 정치사적 전통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석학 존 위티 주니어(John Witte Jr.)는 칼빈과 그 추종자들이 어떻게 인권에 관한 독특한 신학과 법학 이론을 발전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근대적 제도와 헌법을 창설하고 발전시켰는지 탁월한 논리로 설명했다.
종교개혁을 열망하는 기독교인의 양심과 종교 행위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이에 상응하는 집회, 표현, 예배, 전도, 교육, 자녀 양육, 여행 등 신앙의 기초가 되는 권리, 즉 기본권의 보장이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자녀 양육에 대한 부모의 권리에 대해 국가로부터 간섭과 강제를 배제하고 자유를 확보하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했다.
20세기에 68혁명 이후 개신교가 영향력을 발휘했던 국가들이 젠더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올바름’의 쓰나미에 의해 무너져 자녀 양육과 공교육, 그리고 표현과 예배의 자유마저 박탈당하거나 제한당하는 상황이 유럽과 북미에서 벌어졌고, 칼빈주의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미국에서는 이러한 법과 권리의 전통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강화되고 있다.
칼빈의 위대한 업적은 교회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인의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현실 정치 속에서 공화주의적 헌정주의가 왜 필요한지 논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러한 그의 학문적 · 실천적 헌신은 근대적 헌법의 출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경우 1649년의 “교회 강령”(Platform of Discipline)은 코튼(John Cotton) 목사와 윈쓰롭(John Winthrop)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인의 정치의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공공적 정치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가장 중요한 공동체라는 입장이다. “언덕 위의 도시”(City on a Hill)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성경에 기초한 미국이라는 국가의 사명과 국민들의 강력한 정치의식은 독립 정신의 기초가 된 공화주의에 의해 식민지 초기의 ‘신정주의’가 희석되면서 독특한 미국적 정치사상을 탄생시켰다.
공화주의 사상은 크게 다섯 가지 기본 관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① 법의 지배, ② 자유(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자유가 아니라 토지와 무기를 소유한 ‘독립적 시민’이 공공 정치에 참여하는 공화주의적 자유를 의미한다) ③ 시민이 참여하는 공공 정치체(Commonwealth), ④ 인민에 의한 정부 ⑤ 혼합정체(mixed government) 사상이다.
특히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권력 분립을 이루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혼합정체로서의 “공화제”는 “공화국”(republic)을 표현한다. 대한민국이 민주 공화국이라는 의미는 바로 공화제가 정착되어 권력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 헌법의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가 실현되는 공화국이라는 의미이다.
III. 전근대적 기독교인의 정치의식
주자 성리학의 “문화 이데올로기”로 통치 구조와 정치의식을 체계화한 조선이라는 전근대 유교 왕국과 기독교인 특히 청교도는 상호 양립이 불가능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정치 집회에서, “백성”의 관점으로 대통령에게 성군이 되어달라는 청원이 이어지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국모’라고 호칭하는 것을 넘어서, 공화국의 대통령을 ‘정치적 인격’ 그 자체로 신봉하기에 이르는 상황은 대통령에게도, 공화국에도, 그리고 국민 자신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근대적인 유교적 정치의식의 상태에서 “혁명”이라는 과격한 반 자유 민주적 사상이 좌-우 양 진영을 강타하여 다수의 지지로 쉽게 헌법의 권위를 부정할 수 있다는 위험한 주장들이 광장에서 판을 치기 시작했다. 부당한 권력을 반대하고 막기 위해 광장에 나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광장을 점하는 일부 세력의 위험한 정치의식이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이 스스로 촛불 혁명을 운운하며 헌법 위에 군림하는 혁명 세력의 수장을 자처하는 듯 권력 분립의 견제와 균형을 청와대가 앞장서 붕괴시키고 사법부를 특정 사조직을 통해 장악하고 법관이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최근에는 검찰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처”라는 견제가 불가능한 중국식 수사 기관을 창설해서 공화제의 견제와 균형 원리를 파괴하고, 일부 정치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려는 반 헌법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헌법과 헌정을 수호해야 하는 대통령이 앞장서서 국가 안보를 해체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볼모로 하여 북한 정권을 돕는 헌정사 최대의 위험 상황, 즉 자유 민주 공화국 자체의 소멸 또는 해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경악하는 것은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 반대 집회를 주도한 일부 기독교인들이 위기 상황을 내세워 “4·19식 혁명”을 주장 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좌파 전체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인민재판”을 “국민 재판”이라고 명칭만 변경하여 일부 인사들에 대한 재판 없는 처벌 등을 구호로 외치고 대중을 선동한 것에 대해서 우파의 반성과 성찰이 없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프랑스 혁명의 천박함과 그 위험성을 지성계에 고한 이후, 프랑스 혁명이 진보라는 미명 하에 전체주의의 역사적 기원이 된 문제점들을 밝힌 연구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상대 정파를 제압하거나, 포퓰리즘으로 공화제를 파괴하는 세력을 응징하자는 명분으로 또 다른 혁명을 선동하고, 전체주의적 대응 방안들을 주장하는 것은 또 하나의 반 자유 민주적 정치 운동이 될 수 있다.
미국의 독립 혁명이 “시민 혁명”으로서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근대적 헌법의 모델과 같은 미국 헌법을 근대 정치사에 등장시켰으며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공화주의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자유권을 기본권으로써 보장하는 “법의 지배(입헌주의)”를 성취했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자유 민주 공화국의 건국과 발전을 역사 속에서 현실로 보여 준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청교도들과 칼빈주의는 큰 기여를 했다. 바른 신앙은 성숙한 정치에 참여하는 공화적 시민의 윤리적 기반이 되고, 이러한 건강한 교회와 사회의 도덕적 저력이 대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적 정치의식의 발전에 순환적으로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함부로 “저항권”을 말하며 “혁명”과 전체주의적 관점의 폭력적 구호들을 정당화시키고자 시도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성찰과 반성이 필요한 상황이다. 칼빈이 말했듯이 기독교인의 ‘저항권’은 성경의 권위를 삶 속에서 부정하도록 강요받는 상황과 기독교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박탈되는 상황에서 인정될 수 있다. 만약 문재인 정부가 국민의 의사에 반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을 추구한다든가 현재 공화국의 법체계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위험하고 긴박한 사태가 아닌 한 기독교인은 함부로 “혁명”이나 “저항권”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전체주의적 처벌과 감시, 공화제를 훼손하는 권력의 독점 현상과 기독교인이 용인할 수 없는 인권 멸시의 대북 정책과 각종 사회주의 정책에 대응하는 우리의 투쟁은 부당한 압력과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처벌 감수 의사를 기초로 한 평화적 불복종 운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도덕적 우월성을 설파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IV. 나가며
기독교인은 기독교인다워야 한다. 청교도주의와 공화주의의 긴장과 타협 과정은 미국의 법과 정치 문화 발전에 역사적으로 상당한 기여를 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고, ‘언덕 위의 도시’와 같은 국가와 개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앙인의 소명 의식은 전쟁과 분열을 극복하고 평화와 인권, 그리고 번영을 보장해 주었다.
좌-우 양 진영의 비합리적 진영 논리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배신자 낙인찍기 등의 저급한 정치의식과 행태들은 극과 극은 통한다는 전체주의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면 배신자로 낙인찍고, 자기들 세력과 함께하지 않으면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고 단정 짓는 등의 폭력적 태도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전체주의적 사상과 행위라는 것을 철저하게 성찰해야만 한다.
끝으로, 독일에서의 “기독민주연합(기민련)”이라는 기독교를 당명으로 하는 정당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현실 정치와의 타협으로 오히려 기독교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기독교 정당”을 추구하는 활동에 대해서도 필자는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목사가 직접 정치판에 등장하거나 정치인들의 정치 공학의 배후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고자 하는 한국적 흐름과 독일의 ‘기민련’은 또 다른 정치적 지형을 갖는다. 지면의 한계 상, 여기서 깊이 논할 수는 없지만, 동성혼을 막지 못한 독일의 “기민련”보다 청교도로서 신앙적으로 훈련된 판사, 정치인,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고 때로는 압박하는 기독교적 시민 단체와 수준 높은 참여적 교회들이 법과 정치에서 기독교적 가치의 공공선을 지켜내는데 더 탁월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위기는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위기에 등장하는 어떤 흐름은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는 세력에 의해 차악이 아니라 최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체주의의 역사를 통해 더 특별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ejh814@naver.com>
글 | 이정훈
서울대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영국 에딘버러대&일본 고베대 방문교수로 활동하였다. 일본 인도태평양문제연구소(RIIPA) 이사 및 부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울산대학교 교수(법학)이자 엘 정책연구원(ELPI) 원장과 PLI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