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와 결혼 그리고 성화

2019-10-27 0 By worldview

연애와 결혼 그리고 성화

 

월드뷰 10 OCTOBER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글/ 책읽는사자(사자그라운드 대표)

 

고통의 재 자각

 

한국 크리스천들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고통의 카테고리는 국한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크리스천들은 적어도 물을 구하기 위해 성폭행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6시간 동안 음침한 숲길을 걷지 않을 테고, 단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날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고 심한 욕설과 구타로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 ‘이 곳’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문화권에서 발생하는 고통에 대한 체득적 지식이 전무하다는 말이다.

사람은 알지 못하면 생각하지 못한다. 마치 한국 크리스천들이 힌디어로 기도하거나 묵상하지 못하듯 말이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알지 못하면 아파할 수 없다. 겪지 못하면 아파할 수 없다. 즉 지정학적 위치가 나의 고통의 종류를 한정 짓는다는 말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자칫 내 임의로 고통의 경중을 나눠 특정 고통을 평가절하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보다 힘든’ 고통이 있다. 어찌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충치로 인한 치통이 같다고 할 수 있으랴.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주요 맹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통도 아프다’라는 것이다. 당사자가 아프면 고통이다. 당사자가 괴로운 게 고통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가 인격적이고, 개별적이신 이유다.

선진국형 서비스산업이 고도화된 우리나라에서는 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잦다. 이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재적 고통이라 더욱 복잡다단하다. 쉽게 말해 우리들의 생활 속 연애 문제, 결혼생활 문제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멍들고 썩어지는 게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복음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어야 한다. 만약 이 지점에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복음의 답안이 부재하거나 빈약하다면 바로 이 틈을 통해서 사탄이 역사한다. 한 마디로 (몇몇) 한국 크리스천들은 ‘고작’ 연애와 결혼 문제 때문에 천국 여권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변환(變換)의 겸손

 

내가 받는 고민 상담 메일 열 통 중 아홉 통은 ‘연애와 결혼’과 관련된 질문이다. 혼전순결을 잃고 괴로워하는 내용, 배우자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제발 도와달라는 내용, 아버지의 강요 때문에 원치 않는 결혼을 해서 현재 별거 중이며 곧 이혼을 준비 중이라는 내용, 유부남의 성적 추태를 견디지 못해 교회를 옮길까 고민하는 내용, 10살 이상 나이차 나는 싱글 연하남과 외도를 즐기는 유부녀가 보낸 내용, 성적으로 문란한 남자 한 명 때문에 여자 여러 명이 도망가듯 교회를 떠났다는 내용, 모태 신앙인 남자 친구가 교회를 너무 증오해 이별을 할까 고민한다는 내용 등… 잊지 말자. 고민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교회 내 크리스천들이라는 것을.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fallacy of hasty generalization)’를 매우 경계한다.]

굳이 구체적인 사례를 적시함을 못마땅해 하는 분도 계실 테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사적인 연약함과 상처를 이런 공적인 지면에 일일이 열거함은 그리스도인의 격을 낮추는 설익은 청년의 어설픈 미숙함이자 (일종의) 은밀한 교만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어른들이여. 연애와 결혼 생활 문제는 우리 크리스천의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터이다. 이 영적 전쟁에 대해 복음의 가르침이 추상적이고 모호하면 안 된다. 그건 비기독교인 예술가 마을에서나 통용되는 허기진 외침일 뿐이다. “성관계는 결혼 후, 자신의 배우자와만 하는 것이다”, “비기독교인과의 연애결혼은 세계관의 충돌이다. 각자 금과 똥이라 여기는 것이 다른 것이다,” “부모님 몰래 모텔 간 것 회개하자. 한 번도 안 넘어진 것도 믿음이겠으나, 백 번 넘어져을 때 백한 번째 다시 일어나는 것도 믿음이다.”라고 복음적 성화됨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사회생활적 언어로 변환하여 말해줘야 한다. 마치 신께서 인간들을 위해 친히 히브리어를 사용하여 복음을 설명해 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복음한국’ 캠프에서 강연하는 책읽는사자.

 

원래의 사랑

 

예수님은 밥같이 오셨다. 어떠한 조미료도 없이 담백한 구유에 담기셨다. 스페셜 피자 같은 삶이 아닌, 조용한 시골 목수의 삶이었다. 긴 생머리와 하얀색 피부가 아닌, 햇빛과 고통에 그을린 전형적인 중동 팔레스타인 남자의 외모였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슬프고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배경 음악도 없었으며 전문적인 카메라 줌 인과 그동안의 사역을 펼쳐 감동을 자아내는 파노라마 효과가 없었다. 하물며 당신의 위대하신 부활도 홀로 ‘조용히’ 하셨다. 그 부활하신 성체로 제자들을 위해 친히 생선을 구워주시고 말이다. 이것이 밥이다. 피자의 맛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진실 그 자체 말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우리의 삶도, 우리의 사랑도 밥이 되어야 한다. 내 감정이 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작은 단면이다. 내 감정에 기반하여 사랑을 측정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성이다. 배우자가 갑자기 “당신보다 내 심장을 더 뛰게 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났어.”라고 말해도 “그건 틀렸다.”라 말할 수 있는 절대적 표준이 부재하다는 말이다. 사랑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오래 참으신다. 잊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신다. 먼저 희생하신다. 더불어, 절대 타협하지 않으신다. 절대 변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밥 같은 사랑이다. 우리의 연애와 결혼 속에 적용해야 할 사랑이 바로 이 사랑이다. 결혼 전 스킨십을 절제하고, 결혼 후 외도를 금해야 한다. 배우자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며, 부부 사랑의 존속은 예배로 귀결되어야 함을 믿고 행해야 한다. 이것이 ‘원래의 사랑’이다.

 

생활과 신앙

 

그렇다면 우리의 연애와 결혼 생활에 이 ‘원래의 사랑’이 스며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독서다. 피조 세계는 신의 말씀으로 지어졌고, 우리의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말씀과 들음, 그 중간 다리가 바로 글자다. 옳고 그름의 도덕적 가치 체계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올바른 글자’를 반복해서 읽어주어야 한다. 기억해야 하며 체화되어야 한다. 크리스천에게 독서는 선택이 아닌 의무인 것이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아 뭐야. 결국 성경 읽으라는 거잖아?’라며 추상적 결론 도출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다. 아는데 안 되는, 알면서 안 되는 분들이 갖는 영적 절규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연애와 결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과 악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본인의 지적 체계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다. 그 지식의 본위가 성경이다. 그래서 성경 독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의 언어가 현대 크리스천의 삶에 면밀히 와닿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66권에 나오는 방대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나의 삶에 적용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유기적 인과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지력이 부족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졸업 전까지는 기독교 서적 위주로 책을 읽었다. 일종의 반석 기초 공사다. 그 뒤, 비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자칫 일반 서적이 주창하는 유물론, 무신론, 진화론에 내 잠재의식이 서서히 동화되지 않을까 걱정한 면도 있었지만 오히려 정반대였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방문해보면 볼수록 오히려 반석 위에 지은 집이 주는 유익과 감사를 더욱 깊이 알아갈 수 있었다. 일반 서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생활과 신앙이 합일시 되는 순간이다.

 

나의 작은 예수

 

복음 세계관의 가장 큰 유익은 통찰과 분별이다. 하나님을 더욱 알고 싶어하는 선한 호기심도 확장된다. 복음의 독서 습관은 쾌락적 성욕을 능가한다. 나의 사랑관과 내가 사랑하는 방식에 복음의 격이 생긴다. 타성에 젖어 소멸했던 공감 뉴런이 성령의 소생으로, 이제 나의 탐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나의 희생과 배려로 상대방을 사랑하게 된다. 왜? 본인 스스로 올바른 지식에 설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눈빛이 다르다. 목소리가 분명하다. 믿음은 강하고 배려는 부드럽다. 공과 사가 일치한다. 사적인 습관도 거룩하다. 지식이 우리를 세운다. 성화의 도입이 독서인 것이다.

올바른 독서는 무지의 지를 깨닫게 한다. 올바른 사랑은 나의 허물을 깨닫게 한다. 연애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내와 함께 지낸 지 어느덧 9년 정도 되었다. 아내와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마음이 겸허해진다. 감히 고백하건대 나는 아내에게 빚진 자다. 부족한 나를 사랑해주는 아내에게서 나는 작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체감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에게 독서의 마지막 페이지는 언제나 아내의 따뜻한 사랑이다.

복음은 구체적이다. 주님은 일요일 아침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 월, 화, 수, 목, 금, 토, 교회 밖, 세상 속 –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의 연애와 결혼을 인도하신다. 짜고 밝은 소금과 빛으로 말이다. 연애와 결혼 생활의 영적 중요도를 진지하게 다시 자각하자. 고통의 서열을 성숙하게 재배열하자. 우리는 아파야 할 것에 아파해야 한다. 나의 고통에 하나님의 고통이 투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작은 예수, 나의 영적 나침반은 나와 가장 가까운 아내(또는 애인)이다. 하나님처럼 사랑하자. 하나님을 배우자. 그것이 대한민국 크리스천이 감당해야 할 고통이다. 천국의 기쁨이다.

 

유튜버 ‘책읽는사자’의 유튜브 채널.

<sazaground@naver.com>

 

글 | 책읽는사자

기독교 유튜버로서, 성경적 관점으로 다양한 사회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실제적이면서도 바른길을 제시하려고 노력 중이며, ‘사자그라운드’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