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주권: 교회, 시장 그리고 국가
2019-08-22영역주권: 교회, 시장 그리고 국가
월드뷰 08 AUGUST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4 |
글/ 김승욱(발행인,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1. 들어가며: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개인의 자유는 국가에 의해 어느 정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정도 제한받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개인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경제영역이나 종교의 영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보장할 것인가를 두고도 논란이 많다. 목사의 자격을 국가가 정하는 것이 옳은가? 기업 경영에 국가가 어느 정도까지 관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시장의 가격 결정에 정부가 어느 정도 개입하는 것이 적절한가?
이 짧은 글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제시하기 어렵지만, 경제 영역을 중심으로 영역주권이라는 측면에서 성경적 견해를 생각하고자 한다.
2. 컴멘딩 하이츠(The Commanding Heights)
퓰리처상(Pulitzer Prize)을 수상한 다니엘 예르긴(Daniel Yergin) 등의 저서 <The Commanding Heights: The Battle Between Government and the Marketplace that is remaking the Modern World(<시장 대 정부>, 주명건 역, 세종연구원)>는 근현대 시대를 시장과 정부 사이의 주도권 싸움의 시기로 규정했다. 레닌이 한 나라 경제를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기간산업을 컴맨딩 하이츠라고 불러서, 이 단어는 기간산업을 의미하게 되었다.
19세기는 자유주의 시대: 과거 동양의 왕조시대나, 서양의 절대주의 시대에는 국가가 주요 산업을 포함해서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서양에서 절대주의 시대의 중상주의(Mercantilism) 이념은 국가가 부국강병을 위해 경제를 통제하는 체제였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나폴레옹 전쟁(1803-1815)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3년까지 약 100년간은 자유주의 시대라고 불린다.
20세기 전반 = 국가주의 확산기: 그런데 1873년 이후 유럽은 불황이 찾아와서 20년 이상 지속되면서 점점 보호무역주의로 변하게 되었고, 결국 이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낳게 되었다. 또한 1917년에 소련에서 시작된 공산화는 동구권으로 확대되었고 마침내 1949년에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상당부분이 공산화 되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국가가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중남미 국가들이나 인도 등은 자본주의 진영보다는 사회주의 정책을 선호해서 지구상의 많은 나라들이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게 되었다. 공산주의가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도 복지를 확대하면서 복지국가가 확산되었는데, 이것 역시 국가가 시장에 깊숙하게 개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 미국에서 발발한 대공황으로 인해서 케인즈가 주장처럼 경제학에서도 국가가 예산지출의 조정을 통해서 경기변동에 개입해야 한다는 수정자본주의가 힘을 얻게 되었다. 또한 1960년대 이후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경제개발을 국가 주도적으로 하면서 이제는 국가가 경제발전에 깊숙하게 개입하는 것이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20세기 초부터 중반까지는 국가주의가 확대하는 시기였다.
20세기 후기 = 자유주의 확산기: 그런데 1980년대에 세계는 급변했다. 1979년에 등장한 영국의 대처 수상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에 나오는 자유주의 이론을 정책으로 도입했다. 영국에서 가장 강한 석탄노조의 스카길 노조위원장과 싸워서 승리한 이후 영국은 급속하게 국가의 시장경제 간섭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역시 작은 정부를 주장하면서 세금을 낮추는 소위 ‘공급중시 경제학’을 도입했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는 모두 시장에서 국가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0년 후인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에 동독의 다섯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독일이 통일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1년 12월 26일에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모든 소련의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독립국가연합(CIS)의 수립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소련 지도부를 해체했으며, 소련의 핵무기 발사 시스템을 포함한 전권을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승계했다. 구 소련연방에서 탈퇴한 독립국가연합 소속의 많은 나라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도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WTO에 가입했으며, 칠레, 인도 등 사회주의 국가들도 시장경제 체제에 들어왔다. 마지막까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던 쿠바와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등도 모두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이제 지구상에 공산주의 국가로 남아있는 것은 북한이 거의 유일하다. 스탠퍼드 대학의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Yoshihiro Fukuyama, 1952~) 교수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대결은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하여 이를 <역사의 종말 The End of History>이라고 표현했다.
3. 새로운 국가주의의 확산
이렇게 국가주의의 약화되는 듯 했으나, 세계 각지에서는 다시 국가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특히 문화, 예술 등 사회의 각 영역에서 이러한 경향을 확대되고 있다. 이는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 ~ 1937)나 헝가리의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 1885~1971) 등이 1920년대에 주장한 신마르크스주의(Neo-Marxism)의 영향이 크다. 이들은 생산양식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영역에 도입했던 착취 개념을 성과 문화 영역으로 확대시켜서 소수자의 착취 문제로 변화시켰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하부구조(즉 경제영역)가 상부구조(법, 문화 등)를 결정한다고 주장한 것에 반해, 그람시는 비인간적인 문화와 인간 소외를 중점으로 다루면서 신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의 토대를 만들었다.
마르크스는 역사가 필연적으로 봉건제사회, 자본제사회를 넘어 공산제사회로 간다고 본 필연성을 주장했다. 반면, 그람시는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에 직면하여 붕괴한 뒤에 역사의 필연으로서 공산주의가 저절로 등장할 것이란 마르크스의 역사적 결정론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 사회의 주체인 인간의 투쟁, 의지, 참여에 의해서 역사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서구사회가 공산주의화되지 않는 이유는 강제기구로서의 국가 외에도 강고한 시민사회가 참호처럼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 시민사회를 점령하기 위하여 교육, 언론, 학계, 예술, 문화 등 사회 각 부문별로 참호를 점령해 들어가는 진지전(War of Position)이 필요하고, 어느 정도 충분한 시간이 흘러 시민사회를 점령한 다음에 기동전(War of Maneuve)을 펴서 공산주의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또한 휴머니즘을 마르크스 사상에 결합시켜, 인권, 평등, 평화, 나눔, 섬김, 정의, 소수자 보호 등을 앞세워서 기존의 서구 문화를 공격했다. 신 앞의 평등이 아니라, 결과적 평등을 지향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강조하면서 서구문명을 소수자의 인권을 억압하는 체제로 비판했다. 인간의 가장 강한 본능은 돈으로 표현되는 재물에 대한 욕구이고, 둘째는 성 욕구인데, 바로 이 성 욕구의 해방을 인권이라는 가면으로 포장해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고 하고 있다.
그람시는 또한 과정으로서의 혁명 (Revolution as Process)이란 개념을 만들었는데, 급격한 단절을 통한 혁명 대신, 사회 변화의 전 과정이 혁명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이런 영향을 받아 민족, 민주, 진보라는 이름으로 학교, 영화, 문화, 역사해석 등 각 영역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일제와 독재의 잔재를 비판하며 북한 인권에는 눈을 감는 현상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냉전시대는 종언을 고했지만, 세계는 지금 도처에서 국가주의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계속되고 있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빈번한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자, 정부는 슈퍼히어로 등록제를 추진한다. 어벤져스의 독자적인 판단에 맡기기보다 직접 관리, 감독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의도였다. 아이언맨은 정부의 방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에 블랙위도우, 워머신, 블랙 팬서, 비전, 스파이더맨 등이 동조한다. 반면에 캡틴 아메리카는 각 어벤져스들이 자유롭게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반대한다. 그러자 윈터 솔져, 팔콘, 호크아이, 스칼렛 위치, 앤트맨 등이 동의한다. 오늘날 세상의 갈등을 슈퍼 히어로우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4. 한국에서 국가 역할의 확대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한국 경제성장 모델의 특징으로 수출주도, 대기업주도, 정부주도라는 주장이 많다. 이 중에 수출을 통해서 성장하고, 대만과 달리 대기업 중심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만, 정부가 주도해서 성장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정부가 경제성장을 주도한 구 공산권 국가들이나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정부가 은행도 독점하고, 경제계획도 실시하는 등 경제성장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그래도 시장경제의 원칙인 경쟁은 활용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이를 ‘정부주도적 차별화 전략’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국은 고도성장기를 지나면서 민간부문이 성장하자, 정부가 주도하던 영역을 민영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역대 정부들은 주요 기간산업들을 민영화했다. 정부가 만들었던 포스코도 민영화시켰고, 통신, 항공, 철도, 전기, 은행 등 주요 기간산업 전 영역에서 민영화를 추진해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러한 민영화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기업에 대한 간섭도 커지고 있다. 기업 총수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면서, 한진그룹의 소유권 위기를 맞이하였다. 국민연금 규모가 확대되면서 연금사회주의로 간다는 비판도 일어나고 있다. 민영화된 포스코 등도 여전히 정부의 영향력이 지대하다. 은행 민영화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금산분리 원칙에 의해서 은행 주인 찾아주기는 진척이 별로 없었다. 지금도 신한은행과 하나 은행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영으로 운영될 정도이다.
사회 각 영역별로 보면 아마 국가의 영향이 가장 큰 영역이 교육 영역일 것이다. 사립학교들도 등록금을 자율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정부가 교사 월급의 대부분을 지급한다. 이를 통해서 커리큘럼 및 급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제를 하고 있다. 대학은 자율권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지금 급속히 정부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최근 강사법을 개정해서 강사 급여의 일부도 국가에서 지급하며 앞으로 점차 확대될 것이다. 교육영역에서 자율이 가장 높았던 유치원도 이제 점점 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고 있다. 누리과정을 통해 유치원 및 유아원의 교육과정도 이제 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고 있다.
영리병원이 허용되지 않는 의료분야도 정부의 영향력이 커져가고 있다. 의료보험 제도를 통해 강력히 통제되고 있는데, 이번에 문케어라고 불리는 의료개혁으로 비급여의 상당부분이 급여화 되면서 더욱 정부의 지원과 함께 간섭이 확대되고 있다.
복지 영역도 정부가 깊숙이 개입하는 영역이다. 지금까지 예산 부족으로 인해서 민간 부문에서 유아원, 요양시설 등 상당한 부분을 감당했었는데, 점진적으로 이러한 영역도 정부의 관할 밑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종교영역에도 확산되고 있다. 목사의 자격은 국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교단이 결정해왔다. 신학교도 학교의 일종이기 때문에 교육부가 정원 등을 통제하지만, 지금까지 각 신학교들은 교육부에서 허락한 인원 이상으로 목사를 배출했고, 각 교단과 목회자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최근 송사사건으로 인해 특정 교단의 목사 자격을 대법원에서 판단하는 일이 일어났다.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종교인 과세제도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일부 종교계의 반발이 있다. 반면에, 종교인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는 것은 과도한 특혜로 인해서 조세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주장도 있었다. 탈세를 빌미로 국가가 이제 종교 영역을 통제할 수 있는 단초가 형성된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정치적으로 공명정대하고 중립적인 정부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자칫하면 종교가 정치적 분쟁에 휩싸일 수 있다는 우려는 기우가 아니다.
5. 영역주권
사회의 각 영역에 국가가 어느 정도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성경 구절을 찾기는 어렵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다스려달라고 했을 때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았다(삼상 8:6). 그리고 하나님께 고했을 때 하나님은 왕이 어떻게 백성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아 종으로 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삼상 8:11-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달라고 해서 왕을 세우게 된다. 이 말씀을 근거로 통치자는 국민을 종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정도의 의미는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왕이 재판을 할 때 공정하게 하라고 레위기에서 명령하고 있다.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고, 반면에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재판을 하라고 한다(레19:15).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것이 성경 곳곳에서 명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라고 하고 있는데,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는 그의 재산의 유무 등에 영향을 받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가가 사회 각 영역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쳐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성경 말씀은 찾기 어렵지만, 이에 대한 믿음의 전통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1880년에 행한 자유대학교 개교 연설에서 “영역 주권”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자유대학교가 지닌 개혁파의 원리를 ‘영역주권’을 통해 제시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우리 삶의 영역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은 영역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예술, 교육 등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권위를 위임하셨는데,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 권위가 왕에게 위임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부에서는 오늘날은 이 권위를 위임받은 것이 국가라는 잘못된 주장을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오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위임되었고, 메시아의 절대적인 주권은 사람들의 삶을 각자 자신의 주권을 지닌 고유한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사람이 살아가는 범위는 도덕적 영역, 가정의 영역, 사회적 삶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더 확대시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연의 범위, 삶의 범위, 사유의 범위, 양심의 범위, 그리고 신앙의 범위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영역들은 자신들의 톱니바퀴로 서로 맞물려 있기에 하나의 영역이 다른 인접한 영역을 침해하는 위험도 발생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국가의 특별한 권위 영역이 등장하여 다양한 영역들 사이를 조화롭게 만들고, 집단에 의해 억압받을 수 있는 개인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국가의 주권은 개인을 보호하고 가시적인 삶의 영역들에서 상호 정당한 관계를 규정하는 권세로서, 명령권과 강제력으로 이 모든 영역들 위에 탁월한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영역 안에서는 이 국가의 주권이 적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여기서는 다른 권위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 권위는 국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에게서 내려 온 것으로 국가에 의해 부여된 권위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인정된 권위다.“
카이퍼는 사회의 모든 주권은 궁극적으로 창조주의 절대 의지에 기초한다고 확신하면서,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적 사상이나 무신론적 인본주의 사상이 침투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세운 기독교 대학을 자유대학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국가와 교회의 간섭을 배재한 자유로운 대학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며, 사회와 문화를 성경적 기초 위에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다.
신칼빈주의자로 구분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주장과 같이 국가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든 영역을 통제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각 고유의 영역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가 있고, 이것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영역과 시장 영역에 지나치게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6. 맺음말
국가의 역할의 한계에 대해서 각 정당이 견해가 다르듯이, 교회 안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진영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각 이슈별로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해서 어떤 것이 더 성경적인가를 면밀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의견이 다를 때 일수록 하나님의 뜻을 성경 속에서 찾으려고 노력하고,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됨을 잊지 말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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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승욱
중앙대학교 경영경제대학 경제학부 교수이다.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경제사로 박사학위(Ph.D.)를 받고 UNPD 국제 전문가와 중앙대 동북아 연구소장, 경제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