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아데나워에게 배우는 국가관·통일관

2019-07-26 0 By worldview

이승만과 아데나워에게 배우는 국가관·통일관

 

월드뷰 06 JUNE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6

 

글/  이영기(교수, 함부르크 한독연구소 소장)

 

가짜 김일성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환영 대회로 평양 공설운동장에 모여든 군중들 속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었다. 당시 평양에는 전설적인 영웅 김일성 장군(60세 이상으로 추정)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고 다수의 군중들은 환영 연단에 그 노(老) 장군이 올라올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평양 시가지에 무성했던 또 하나의 소문은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고 김구 선생이 국무총리, 김일성 장군이 국방부 장관이 된다는 이야기였는데 그 여파로 전설적인 영웅을 직접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던 것이다. 그런데, 30대 초반의 새파란 젊은이가 올라왔으니 충분히 소란이 날만 했다. 이것이 당시, 10세 소년이었던 필자의 가짜 김일성에 대한 첫 경험이다.

필자는 1935년 평안남도 순안(현재 평양 소재)에서 출생하였고 선친이 은행원인 관계로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소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조국의 광복과 해방을 맞았으나 그 해방의 감격은 소련군의 평양 진주로 인해 채 열흘도 가지 못했다. 소련군이 평양에 진입할 당시는 해방군으로 인식되어 수많은 인파가 소련 기를 흔들며 맞이했는데 그 환영 인파 속에는 어린 필자도 있었다. 북한 지역의 소비에트화를 목적으로 소련 군정의 위세를 등에 업은 젊은 김일성은 정적들을 제거하며 북녘땅을 붉게 물들여가고 있었고 ‘북한의 스탈린’으로 불리는 것을 즐기며 점차 수령으로 군림해갔다. 1946년 3월에 시행된 토지개혁의 횡포 아래 수많은 이들이 정든 고향을 등지며 월남을 감행했다. 필자도 그때 어머니에 손에 이끌려 고향을 떠나왔다.

독일 유학길에 오른 필자 사진.

 

그 후 1960년대 중반 공무원을 사임하고 무작정 독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배로 이동하였기에 한 달이 넘는 긴 여정이었지만 망망대해에서 미래를 설계하며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던 때이기도 했다.

독일 유학생 1세대로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독일에 거주하면서 북한 연구에 천착하고 있는 필자는 여전히 김일성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저 흑암의 땅에 해방이라는 광명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고대하며, 미력하나마 조국 통일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에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책상 앞을 지키고 있다. 국가의 안위는 올바른 국가관의 정립에서 비롯된다. 반세기 가까이 독일에서 살아온 필자의 눈에 비친 오늘의 대한민국은 침몰해가는 배와 같다.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의 국가관에 큰 구멍이 났다. 노구의 몸을 이끌고 애써 조국을 방문하는 것도 이 구멍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애달픈 기대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통해 무너져가는 국가관을 다시금 세울 수 있을까? 다각도로 모색해 볼 수 있겠지만 필자는 아데나워(Konrad Hermann Joseph Adenauer, 1876-1967)와 이승만에게서 그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제언하고 싶다. 우선 아데나워와 이승만이 어떤 인물인지 간략하게 비교해보고 그들의 국가관 및 통일관을 알아보자.

 

이승만과 아데나워 인물 비교 : 세 가지 공통점

 

필자는 아데나워와 이승만의 인물됨을 3가지 측면에서 비교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이 두 사람은 인생 역정의 공통점이 많다. 이승만(1875년)은 아데나워(1876년) 보다 한 살 연상이다. 둘은 73세라는 같은 나이에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아데나워는 총리로 추대되었고 각각 90세와 91세의 생을 살았다. 또 아데나워는 프라이브르그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대학을 거치며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들은 풍부한 인생 경험과 경륜을 쌓은 인물이었다. 아데나워는 1917년부터 1933년까지 쾰른 시장을, 이승만은 구한말의 애국 계몽 운동가로서 6년간의 수감 생활을 거치며 식민지 시대의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다.

아데나워 전 총리

둘째는, 강건한 기독교 신앙심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데나워는 전후 독일을 일으키고 무신론적 공산주의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윤리를 토대로 한 기독교적 정당을 창설하여야 하며, 여기에는 모든 층의 사람들이 결집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만이 법과 질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장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승만 박사도 기독교인으로서 1948년 5월 31일 임시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리고 7월 24일 초대 대통령 취임 선서 때, 또한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식 때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셋째로, 두 인물은 정확한 정치적 상황 판단, 분명한 목표 설정 그리고 실천 능력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위인은 소련의 팽창 정책과 분단을 기정사실로 판단하고, 우선 이에 대한 방어책으로 주어진 조건하에서 정통성 있는 합법 정부를 수립했다. 아데나워는 동유럽과 동독에 소련 체제가 이식되는 것을 보면서, 소련의 전반적인 팽창 정책을 막기 위해서 서방 세계 결속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이승만 역시 아데나워와 같이 소련의 영토적 팽창 의지를 간파했고 북한의 식민지화를 보면서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의 회담이 실패하자, 남한만의 단독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환상에 사로잡힌 이상주의자들은 독일과 한국의 분단 과정에서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아데나워의 서방 정책과 이승만의 UN을 통한 건국을, 분단 고착화 정책으로 비난하였다. 만약 당시 이상론자들에게 국가의 운명이 맡겨졌더라면 독일에서는 혼란이 계속되었을 것이고 우리의 경우는 공산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독일의 경우는 그래도 사회민주당이 1959년 고데스베르크 전당대회에서 늦게나마 아데나워의 서방 정책이 옳았음을 인정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분단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은 잘못된 역사 교육에서 비롯된 것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가 매우 시급하다.

 

아데나워와 이승만의 국가관·통일관

 

1)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라는 국가 틀 확립

아데나워와 이승만은 국가의 틀을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로 이루어 놓았다. 아데나워는 전후 자유주의 아니면 사회주의, 서방적 가치 공동체 아니면 중립주의, 사회적 시장 경제가 아니면 계획 경제라는 갈림길에서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선택하였다. 이승만도 자유사상을 토대로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헌법을 가진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이것은 역사상 민주주의 경험이 전혀 없던 나라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2) 6·25 전쟁과 안보

6·25 전쟁은 독일과 한국에게 안보의 중요성을 깨우쳐준 사건이었다. 독일은 6·25 전쟁 발발로 자신들도 언제 유사한 공격을 당할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유럽방위 공동체가 형성되었지만, 프랑스는 독일 재무장에 대한 우려로 이 계획안을 깬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미국의 도움으로 NATO에 가입하게 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서독의 주권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NATO는 동서 긴장 완화 정책과 통일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을 독립 전쟁으로 보았지만 결국 UN의 휴전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 냈다. 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오늘날까지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하고 있으며 더 나가서 NATO와 같이 동북아시아에서의 긴장 완화뿐만 아니라 조국 통일의 견인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6·25 전쟁 휴전 당시와 NATO 가입 시기에 이승만과 아데나워는 대범한 행동을 한다. 이승만은 휴전 반대 조치로 UN 측과 사전 협의 없이 2만 7천여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데나워도 소련에 가서 2차 대전 당시 포로가 된 독일군 약 1만 명을 본국으로 데려왔다. 그는 1955년 9월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수교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포로 송환을 요구했던 것이다. 소련이 거절하자 아데나워는 다음날 당장 독일로 돌아가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소련 측의 양보를 얻어 냈다. 용기의 정치가 큰 효력을 본 것이다. 현재 북한 지역에 적어도 100명이 넘는 국군 포로가 생존해 있다는 보고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 정권과의 정상회담을 벌써 세 차례나 진행하였고 네 번째 정상회담을 물밑에서 조율하고 있다고 하는데, 국군 포로 귀환 문제에 대해서도 이제는 더 이상 방기(放棄) 하지 않기를 바란다.

 

3) 자유 통일

통일 문제에 대해서도 아데나워와 이승만의 견해는 비슷했다. 아데나워는 기독교민주당 창당 대회에서 자유를 선택한다고 하며 동독·서독 간의 통일은 오로지 자유를 토대로 한 통일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동독이 수세에 몰려 동‧서독의 국가 연합 안을 제안했을 때도 자유 민주주의 국가와 독재 국가 간의 연합은 불가능하며 동독에서의 자유선거를 통한 통일을 주장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이승만도 당의 명칭을 자유당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건국 당시 국회 의석 100석을 남겨놓고 북한이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한 의원들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6·25전쟁 뒤에도 그의 통일론은 인구 비례에 의한 UN 감시하의 자유 통일이었다. 이것은 매우 타당한 통일 방안으로 지금도 부활시킬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동독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된 후 서독과 결합했던 것처럼 우리도 북한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된 다음, 대한민국과의 자유 통일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데나워 연구의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한스 피터 슈바르츠(Hana-Peter Schwarz) 교수는 전후 독일에서 아데나워와 같은 인물이 나온 것은 독일로서는 아주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해방 후의 혼란, 6·25 전쟁, 빈곤이라는 악조건에서도 자유 대한민국을 구축한 이승만이 나온 것은 이 조국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비록 실정으로 인해 비판을 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임은 틀림없으며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자임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장차, 이 땅에 자유의 통일이 성취될 때, 그는 아마도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재평가될 것이다.

이승만 지우기가 한창인 이때, 그의 국가관과 통일관이 표류(漂流) 되지 않기를 비통한 심정으로 두 손 모아 기도한다.

(moselee1937@gmail.com)

 

정리: 정교진 박사(북한학)

 

글 | 이영기

1935년 평남 순안 출생으로 1946년에 월남하였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함부르크 대학 정치학 석사를, 자유 베를린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명지대학교 유럽 및 독일 연구센터 소장으로 활동하였고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겸임교수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현재, 독일 함부르크 한독연구소 소장으로, 독일 통일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