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전 발전사(史)와 탈원전 위기

대한민국 원전 발전사(史)와 탈원전 위기

2020-03-11 0 By worldview

월드뷰 02 FEBRUARY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9


글/ 김성훈(건국대 안보재난관리학과 박사과정)


1929년 4월 2일 타고르의 시가 실렸던 《동아일보》 기사.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의 시다. 1929년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아일보》 기자로부터 한국 방문을 요청받았으나 응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대신해 기고한 작품이다. 일제 식민 치하에 있던 한국인들이 희망을 잃지 말고 꿋꿋하게 싸워 독립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낸 격려의 송시(頌詩)였다.1)

타고르는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 불렀다. 91년 전 그의 시구는 마치 예언과 같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성취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탈바꿈한 유일한 나라,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라고 했으나 자유 민주주의를 이룩한 나라, 선교사 파송 2위(인구 대비 1위)의 기독교 대국 등의 위업을 이뤘다.

한반도 야간 위성 사진.

동방의 등불로 타오른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한반도 위성사진이다. 빛나는 대한민국과 대조적으로 암흑에 갇혀있는 북한의 모습은 2020년 새해, 우리의 사명이 어디에 있는지 상기시켜준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떻게 이토록 빛나는 국가로 성장했을까? 그 성장의 원동력에는 혜안을 가진 지도자들과 그들이 추진했던 원자력 정책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좋은 지도자를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원전 개발의 첫 삽을 뜬 지도자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이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원전 개발의 필요성을 알려준 인물은 워커 시슬러(Walker Lee Cisler, 1897~1994) 박사2)이다. 1956년 7월,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과학고문이었던 워커 시슬러 박사는 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원자력 에너지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우라늄 1그램이면 석탄 3톤의 에너지를 냅니다. 석탄이 땅에서 캐는 에너지라면,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입니다. 한국처럼 자원이 적은 나라에서는 원자력 등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합니다.”

1959년 7월 14일, 트리가마크-Ⅱ 연구용 원자로 기공식의 이승만 대통령. 뒤에 있는 사람은 초대 원자력원장 김법린.


이 대통령은 시슬러 박사에게 “한국은 언제쯤 원전을 가질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시슬러 박사는 “20년 후면 충분히 가능합니다”라고 답했다. 시슬러 박사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있은 지 21년 9개월 후인 1978년 4월, 한국 최초의 상용 원전인 고리 원전 1호기가 준공됐다.

시슬러 박사의 조언에 따라 이 대통령은 원전 개발 정책을 차례차례 추진해 나갔다. 1958년 3월 원자력법 공포, 1958~59년 한양대·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설치, 1959년 1월 대통령 직속 원자력원 발족, 동년 3월 원자력연구소 개소, 동년 7월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마크-Ⅱ 착공 등.


원자력 기념 우표.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갑작스레 하야하면서 원자력 개발이 주춤하는 듯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바통을 이어받아 전력 질주했다. 1962년 3월 트리가마크-Ⅱ는 원자로 가동을 시작했고, 박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원자력 에너지를 주요 항목으로 삼았다. 원전에 대한 박 대통령의 뜨거운 관심은 당시 발행된 우표에서도 드러난다.

원자력은 에너지 분야뿐 아니라 의학과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도 적용되어 발전했다. 1962년 12월 방사선의학연구소가 개소되고, 1963년 11월 방사선의학연구소 부속 암병원(오늘날 한국원자력의학원)이 개원한다. 1966년에 개소한 방사선농학연구소에서는 통일벼를 개발해 쌀 생산량 증가에 이바지했다.

1971년 3월에는 고리 원전 1호기(경수로) 기공식이 열렸다. 이는 위기 속에서 내려진 결단이었다. 1964년부터 73년까지 이어지는 월남 파병, 1968년 1.21 김신조 사태, 동년 1월 미 해군 푸에블로 함 나포 사건, 동년 10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1969년 4월 미 해군 정찰기 EC-121 격추. 그리고 1969년 7월에는 ‘아시아 국가의 방위는 아시아 국민의 힘으로’라는 말로 요약되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됐고, 1971년 4월 주한미군 7사단이 일방적으로 철수한다. 설상가상 1973년 10월 제1차 석유 파동이 터지고, 1975년 4월에는 월남이 패망하는 악재가 연이어 발생했다. 하지만 이러한 국내외적 위기 속에서도 박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위기의 순간을 ‘자주국방’ 능력을 키우는 기회로 삼는다. 기관총, 박격포 등을 국산화하는 ‘번개 사업’을 추진했고, 단거리 지대지 탄도 미사일인 ‘백곰’을 개발하며 세계 7번째 유도탄 개발국에 오른다. 또한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수로 도입 –중수로에서 얻어진 플루토늄을 핵무기 개발에 사용할 수 있다- 을 시도했고, 1977년 6월 마침내 월성 원전 1호기(중수로) 기공식을 갖는다.

1972년 오원철 경제수석이 작성한 ‘핵무기 개발 비밀 계획서’. ⓒ월간조선 2003년 8월호.

박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시도한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박정희 정부의 오원철(1928~2019) 경제수석이 1972년에 작성한 ‘핵무기 개발 비밀 계획서’가 2003년 《월간조선》에 특종 보도됐고, 이를 오 수석 스스로도 증언한 바 있다. 해당 문건에는 ‘1980년대 초, 고순도 플루토늄탄을 완성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비밀 해제된 CIA 문건에도 ‘박정희, 1978년까지도 핵 개발 의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75년 5월, 당시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각국 주재 미 대사관에 하달한 외교 지침에는 ‘한국은 핵 개발의 초기 단계를 거쳤으며 10년 안에 제한된 범위의 핵무기와 운반 수단을 개발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연 전 의원의 전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1979년 1월 1일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 혼자 결정한 비밀 사항인데, 2년 뒤 81년 10월에 그만둘 생각이야.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핵무기를 내외에 공개한 뒤 그 자리에서 하야 성명을 낼 거야. 그러면 김일성도 남침을 못할 거야.”


그러나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핵무기 개발의 꿈은 좌절된다. 이후 집권하는 전두환 대통령은 핵 개발 시도는 포기하지만,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형 원전’ 기술을 갖는 데 이바지한다. 영광 3·4호기 건설 수주 경쟁을 붙이면서, 기술 이전을 조건으로 미국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와 건설 계약을 맺는데 이때 이전 받은 기술을 발판 삼아 한국형 원전 기술 개발까지 이어진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2년 2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통해 핵무기 개발에 필수 기술인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한미 원자력협정에 의해 금지된 기술이었다- 스스로도 포기하며 한국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의 싹까지 잘라낸다. 흥미로운 사실은 문민정부임을 내세운 김영삼 대통령이 민간 라인을 활용해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김 대통령 측 핵심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삼 정부는 핵무기 제조를 위한 ‘88 프로젝트’를 추진했다고 한다. 88 프로젝트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하고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데 우리나라도 유사시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88% 정도의 기술을 확보하자는 취지에서 명명됐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시도는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좌절된다.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프로젝트가 언론에 폭로됐고, 김대중 정부 들어 취임한 장영식3) 한전 사장은 프로젝트 중단을 지시한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12월 UAE로 한국형 원전을 첫 수출하는 쾌거를 이뤄냈고,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4월, 42년 만에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하며 핵연료 농축과 재처리 기술 관련해 금지 조항을 없애고 제한적인 허가를 얻어냈다.


이처럼 정권에 따른 여러 부침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원전 기술은 세계 1위 수준으로 성장해왔다. 하지만 ‘탈원전’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 들어 우리 원전 기술은 사장될 위기에 처해있다. 이른바 문재인 정부의 ‘원자력 분서갱유’ 때문이다.

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의 여파로 지난 2년간 쌓인 한전의 적자는 2019년 7월 말 기준 3조 7000억 원에 달한다. 2016년 4조 8815억 원의 흑자를 봤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수치다. 전기세 인상은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지만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원전 핵심 기술을 가진 인재들은 중국 등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원전 관련 공기업 3사에선 재작년 전문 인력 144명이 퇴사했다. 2019년 하반기 카이스트에서 원자력 공학을 전공으로 택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원자력 마이스터 고등학교 학생들의 취업 길도 막혔다. 원전 국제 시장에서 한국은 단연 최고의 기술력과 경제성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불신을 받고 있다. UAE 바라카 원전을 지은 당사국임에도 불구하고 3조 원 규모의 ‘원정 정비’ 계약 단독 수주에 실패했고 하청 업체 신세로 전락했다. 22조 원 규모의 영국 원전 우선 협상자 지위도 상실했다.

원전을 대신한다며 온통 산을 깎아 태양광 판과 풍력 발전기로 채우고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고 국내 태양광 산업은 저가 공세에 나선 중국에 잠식당하고 있다. 또 정부 보조금을 타내 태양광 사업에 뛰어든 좌파 운동권 출신 인사의 부정부패 소식만 연신 들려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탈원전 공약을 내세우게 동기를 주었다는 영화 <판도라> 포스터.

2016년 12월 원전 재난 영화 ‘판도라’를 보고 탈핵·탈원전을 공약으로 삼았던 문재인 대통령은 탈원전 정책이야말로 국가의 미래를 망치는 판도라 상자를 연 행위였음을 이제는 인식해야 한다. 구한말 조선 왕조는 현실 인식을 하지 못하고, 아니 현실을 부정한 채 끝까지 주자학 이념을 쫓다 자신들도 망하고 온 백성의 삶도 도탄에 빠트렸다. 현실을 부정한 채 70~80년대 이념만을 쫓는 현 정권의 말로가 어떠할지, 국민들의 민생은 어디로 향할지 현 집권 세력과 국민들은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할 때이다.

원자력이 밝힌 ‘동방의 등불’ 자유와 번영의 코리아가 이제는 반쪽짜리가 아닌 온 한반도로 확장되기를 염원한다.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viking8933@naver.com>


1) [네이버 지식백과]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인도문학 동방의 등불 (The Lamp of the East), 김우조, 위키미디어 커먼즈
2) 시슬러 박사는 원전 개발을 도왔을 뿐 아니라 1948년 북한의 5.14 단선 조치로 우리나라가 극심한 에너지난에 처했을 때 인천과 부산에 미군 발전함(艦) 두 대(엘렉트릭 함, 자코나 함)를 들여와 전기가 공급되도록 도왔다. 또한 6.25 사변 이후 당인리 화력발전소 3호기 건설(1956.3. 준공)을 위한 차관 도입을 도왔으며, 1957년 한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창립 회원국이 되고 극동지역 이사국에 선출되는 데 힘써줬다.
3) 김대중 대통령의 외가 쪽 인물이다. 장하성 전 정책실장의 셋째 작은아버지이기도 하다.


글 | 김성훈

연세대에서 화학(학부) 및 의과학(석사 수료)을 전공했고, 건국대 안보재난관리학과에서 국가안보전략 전공 석박통합 과정 중에 있다. 월간조선 및 주간조선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 거룩한대한민국네트워크 총무 및 청년한국 아카데미, 히즈코리아 강사로 활동 중이다.